중학교 때, 지역 명문고 필독도서 목록에 들어있다는 책방 아저씨의 추천으로 어머니께서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라는 책을 사다주셨던 기억이 난다. 중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지만, 근사한 표지에, 그것도 부모님, 선생님조차 잘 모르시는 것 같은 인물의 자서전을 읽는다는 치기 어린 뿌듯함에 몇 번을 시도하여 겨우 끝까지 읽었다. 

스콧 니어링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진보적인 학자로서 꼿꼿하게 소신을 밝힌 인물이다. 결국 학계에서 쫓겨나 아내 헬렌 니어링과 단둘이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지만,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생태주의자로서의 모범을 보여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런 행적이 어린 마음에도 멋지고 대단하게 느껴져서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이 분의 이름을 떠올리곤 한다. 다만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바로 이 스콧 니어링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쓴 책이다. 유년시절부터 혼란스러웠던 청년시절, 스콧과의 만남과 연애, 결혼생활, 그리고 스콧 사후의 삶까지 기록했으니 자서전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헬렌 니어링은 유복한 가정의 둘째로 태어나서 독서를 즐기고 음악을 배우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의 제안으로 유럽으로 건너가 바이올린 레슨을 받게 되고, 그곳에서 첫사랑 크리슈나를 만났다. 뜨거운 연애를 했지만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달랐고, 결국 헬렌은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헬렌은 우연한 기회로 스콧 니어링이라는 사람과 알게 되었고, 만난지 얼마 안 되어 사랑에 빠졌다. 스콧은 헬렌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학계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으며, 전처와의 사이에 장성한 아들 둘이 있는 이혼남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고 아름다운 헬렌이 배우자로 택하기에는 아깝다며 부모님이 말렸다. 하지만 여느 러브스토리가 그렇듯이ㅡ 두 사람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름한 신혼집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함께 사는 동안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은, 사실혼 관계였다)   

 

다른 사람들이 난롯가에서 축배를 들고 있을 때 내 속의 어떤 것은 오히려 식어가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잔치를 벌일 때 음식을 끊고 싶은 생각이 들며, 다른 사람들이 빈둥거리며 놀 때 일하고 싶은 어떤 것이 내게 있다. 스코트처럼 내게도 금욕적이고 청교도적인 어떤 성향이 있다. (p.118) 

스코트는 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스코트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p132) 
세상에는 형편없는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데 너는 커다란 집에 산다. 인류의 3분의 2는 영양상태가 고르지 못한데, 너는 지나치게 많이 먹는 사람들을 초대해 그들을 더 과식 상태로 만든다. (p.160)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직장, 더 좋은 집을 찾아 도시로 이주하던 시기에 반대로 두 사람은 시골로 향했다. 한적한 시골에 있는 허름한 집을 사서 부족한 솜씨로 보수하고 장작을 패고 먹을 것을 손수 마련하며 연명했다. 하지만 행복했다. 소유욕의 노예가 되지 않고, 어둡고 혼란스런 사회에서 벗어나 순수한 이상을 지키면서 사는 삶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는 짝이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이 만든 농장은 제법 번성하여, 두 사람이 먹고, 스콧이 단풍나무 숲에서 채취한 메이플 시럽으로 헬렌이 사탕을 만들어 팔면 따로 수익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생활이지만, 두 사람을 보니 요즘 같은 시대에 직접 운영하는 농장 같은 것이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영화관에 앉아서, 단지 일어날 듯 믿게끔 보일 뿐 거의 일어나지 않거나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의 그림을 보는 대신에, 학교 밖에서 당신의 상상력을 시험하고 능력을 일깨우며, 쓸모있고 아름다운 어떤 것들을 만들 수 있는 소질이 당신에게 있음을 느낌으로 확신시켜주는 그런 일들을 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p.191)

 

차츰 스콧과 헬렌의 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고, 호응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두 사람의 농장에 직접 방문하는 사람도 있었고, 편지로 대신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두 사람의 멋진 뜻이 담긴 말과 글이 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신기한 것이, 전에는 스콧의 생애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헬렌의 삶에 관심이 가고 더욱 존경심이 느껴진다. 어두운 사회에 맞서는 삶을 살 인물의 반려자들을 보면 대개 인고와 희생으로 그려지는,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이 많다. 하지만 헬렌의 자서전을 읽고 있자니 어느 귀부인, 재벌 부인보다도 풍요롭고 따뜻한 삶을 산 것 같았다. 물질이나 명예보다도 배우자의 믿음과 사랑을 가진 삶이 더 귀하고, 그만큼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일까? 

게다가 스콧처럼 보통 사람보다 큰 뜻을 품은 강직한 사람과 보폭을 맞춰 걷는 삶을 산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이의 옆에서 평생을 최고의 동료이자 친구로서 산 헬렌이 참 대단하다. 의미 없는 만남과 헛된 명예 대신 이처럼 조화롭고 편안한 삶을 함께 살 누구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이 참 따뜻하고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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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1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못 봤는데, 정갈하고 따뜻한 페이퍼예요. 저는 밥상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서, 자연친화도 모르겠고, 가끔 동물친화적이기는 한 듯한데.. 제가 가끔 들르는데 이 페이퍼 늦게 봤네요. 책 표지 모아두니까 정말 예뻐요. 우리도 조화롭고 편안한 삶을 살아요, 블랙라빗님.^-^

주말 잘 보내시구요!

키치 2011-11-22 16:34   좋아요 0 | URL
덧글이 늦었네요. 저도 읽는 책만 이렇고, 실제 생활은 자연친화, 생태적인 밥상은 고사하고 과식이나 안 했으면 싶어요ㅎㅎㅎ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네요. 따뜻하게 지내고 계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