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마침 최근에 읽은,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미셸 우엘벡의 최신작 <지도와 영토>에도 스티브 잡스의 이름이 나왔다. 주인공 제드가 그린 <IT 산업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라는 작품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에 묘사된 잡스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병마와 싸우느라 여윈 스티브 잡스는 고통스럽고 수심에 찬 표정을 지으며 수염이 듬성듬성 난 꺼칠한 턱을 오른손으로 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자리를 드문드문 채운 무심한 청중 앞에서 아마 두번째 설교를 토해내야 하는 순간 난데없이 의혹에 사로잡힌 순회목사를 연상시켰다. 그럼에도 게임의 주인은 오히려 지고 있는데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쇠잔한 스티브 잡스인 듯한 분위기였다. ...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잡스가 반드시 지는 게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가 퀸을 희생시키는 대신 세 수 만에 비숍-나이트 체크메이트를 만들 경우 승산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라면 신제품에 대한 전광석화와 같은 직감으로 시장에 돌연 새로운 규범을 제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p.228-9) 

이 책은 제드라는 예술가의 일생에 대한 소설이다. 그는 미슐랭 지도를 테마로 사진을 찍어서 예술계에 화려하게 데뷔했고, 그 후로는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직업인들을 테마로 그림을 그려서 또 한 번 큰 주목을 받은, 드물게 성공한 예술가다. 이쯤 되면 그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다거나 누구와 어떤 갈등을 가지고 있느냐가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일 것이라고 짐작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제드에게는 몇 가지 문제가 있고 삶을 살면서 몇 차례 위기를 겪기는 하지만, 그것을 이 책의 중심내용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아쉽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묻는 건 직업이죠. 서구사회에서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생식의 소임이 아닌, 무엇보다도 생산과정 속에서 점하는 위치니까요. (p.189) 

우리 역시 상품이오...... 문화상품. 우리도 곧 한물간 신세가 될 거요. 공산품들과 똑같은 절파를 거쳐서 말이오. 하지만 우리에겐 딱히 이렇다 할 기술 발전이나 기능 개선이 적용되진 않을 거요. 말 그대로 새로운 것을 요구할 뿐이지. (p.205)

그보다는 제드의 삶의 배경을 형성하는 사회구조, 즉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예술의 위치에 관한 소설로 보인다. 지겹다 싶을만큼 세세하게 나열된 상품과 기업, 방송국, 유명 인사들의 이름, 이름들... 이 수많은 '상품명'을 읽다 보면 내가 지금 상업 잡지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오늘날 예술의 위치라는 것은, 그 옛날 왕정 시대에 권력자들이 그렇게 사용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주역'인 기업들을 위해 기능하는 수단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제드의 초기 사진 역시 미슐랭에 근무하는 올가의 눈에 띄어 화려하게 데뷔 했을뿐이고, 화가로서 새롭게 경력을 시작했을 때도 사람들은 그림이 아닌, 그림 속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같은 유명인사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의 작품에서 그의 예술 세계를 본 것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팔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만 주목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전보다 더 발전한 것이 아니라, 여느 생산수단, 생산물과 마찬가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내가 소비자로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공산품이 세 가지 있소. 파라부트 신발과 캐논 리브리스 노트북 프린터, 카멜 레전드 파카가 그것들이오. 이 제품들을 열렬히 사랑하는 나는 이것들이 자연히 해지거나 낡으면 어김없이 똑같은 제품들을 재구입해서, 함께 인생을 보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요. 나를 행복한 소비자로 만드는, 완벽하고 충실한 하나의 관계가 정립된 거지. ... 그런데 이제는 이 단순한 즐거움마저 빼앗겨버렸소. 내가 좋아하는 상품들이 몇 년 만에 진열대에서 사라졌거든. 이유는 너무 간단한데, 글쎄 생산이 중단됐다는 거야. ... 하다못해 하찮은 동물도 멸종하기까지 수천, 수백만 년이 걸리는데, 공산품은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법도 없이 며칠 내로 단칼에 지구 상에서 제거되니 말이야. 이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을 생산라인 결정권자의 파쇼적이고 무책임한 횡포요. (pp.203-4)    

슬프게도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물은 그 마저도 짧은 교체주기로 인해 오래 향유하기가 어렵다. 상품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상품화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연예인조차 점점 더 빨리 뜨고 빨리 잊혀진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충분히 사랑하고 잊을 시간조차 가질 수가 없다. 제드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일원이자 그 자신이 성공적인 문화상품으로서 같은 경험을 한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버지, 연인, 친구에게, 제 때에 제대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못했다. 사랑을 느낄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빨리 그들이 떠나버린 것일까. 어느 쪽이든 비극은 비극이다.

다시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업인이자 발명가, 그리고 새로운 디자인과 미학을 제시한 '예술가'인 그의 사망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전자기기를 몇 달에 한 번씩 갈아치우듯 추모 열기가 빨리 식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게다가 이 기세를 타고 여기저기서 '스티브 잡스 마케팅'을 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일생과 업적이 상품처럼 판매되고 소비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비록 잡스 역시 상품을 파는 기업인이었고, 나아가 그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든 사람이지만 말이다.  

과연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에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의 훌륭한 프레젠테이션과 신제품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에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자문해볼 일이다. (만약 후자라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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