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백 번 달군 금침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언젠가 인터넷인가 책에서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짧은데도 묘사가 어찌나 강렬한지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 임금도 아니요 공자님도 아닌 '고작' 벗에게 이런 정성을 쏟은 학자가 있었다니, 당시로서는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글쓴이가 누군지 궁금하여 이름을 찾아보니 이덕무라고 했다. 같은 시대 사람인 정약용이나 박지원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조대왕 시절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마침 그의 글을 모은 <책에 미친 바보>라는 책이 있다고 하여 서둘러 읽어보았다. 이덕무가 쓴 글과 서간문 등을 모아 만든 산문집인데, 책 제목은 생전에 그가 책 읽기를 마치 미친 사람처럼 좋아했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 '간서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많이 보았는데 이런 뜻이었구나. 

고전이나 유학에 대해 잘 몰라서 간혹 읽기에 어려운 글도 있었지만, 친구나 가족에 대한 글은 읽기 쉬웠다. 무엇보다도 글 한편 한편 이덕무라는 인물의 사람됨이 드러나 재미있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열광한 글은 바로 이 글. 이서구에게 쓴 편지다.

이서구에게 2

내가 단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이(오랑우탄)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만큼 좋아한다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단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것이 생기면 내게 주곤 했는데, 오직 박제가만은 그리 하지 않았소. 박제가는 세 번이나 단것을 먹으면서도 나를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주지도 않았소. 어떤 때에는 남이 내게 준 것까지 빼앗아 먹곤 했다오. 친구의 의리상 허물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는 것이 당연하니, 그대가 내 대신 박제가를 깊이 나무라 주기 바라오. (p.157) 

이 글에 등장하는 이서구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고 박제가는 알다시피 '북학의'의 저자다. 두 분 다 국사 시간에 책에 밑줄 죽죽 그어가며 배운 위인들 맞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위인으로서의 품위는커녕, 이덕무가 좋아하다못해 환장하는 단 음식을 빼앗아 먹는 얄궂은 벗(박제가)과 그런 이덕무의 투정을 받아주는 너그러운 벗(이서구)만 보인다. 게다가 이덕무는 어떠한가. 박제가에게 불만을 바로 말하지 않고 이서구에게 이른바 '뒷담화'를 늘어놓다못해 대신 혼내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이쯤되면 사람 냄새 나다 못해 시트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래, 그들에게도 이렇게 시트콤처럼 즐거운 시절이 있었겠지, 암... 

하지만 이 글만으로 그들의 우정을 전부 판단해서는 안 된다. 뒷부분에 훗날 이덕무가 소중한 벗인 박제가가 북학만 좋아한 나머지 행여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걱정하여 임종을 앞두고도 박제가에게 '임금의 노여움을 사지 말고 부디 몸조심하라'는 글을 남기는 부분이 나온다.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왔는데도 행여 존경하는 임금과 사랑하는 벗 사이가 멀어질까 염려하는 이덕무의 마음이 애처로웠다.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하면, 역사라는 단어의 무게 때문인지 근엄하고 무게 있는 어르신의 모습만 떠올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를 흉보면서도 걱정하는 모습도 그렇고, 박지원이 새로 펴낸 글이 멋지다며 찬사를 보내고, 넉넉잖은 살림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은 지금 내가 작가와 예술가를 좋아하면서도 가벼운 지갑 사정을 걱정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일까. <책에 미친 바보>를 읽으며, 책만큼이나 벗과 인생에 미쳐있었던 조선 후기의 선비 이덕무의 모습에서 오늘을 사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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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오늘 저도 읽기 시작했어요.^^ 아까 커피숍에서 '문장과 학풍에 대하여'까지 읽었는데.. 반갑네요.

키치 2011-08-31 01:33   좋아요 0 | URL
제가 모르는 게 많아서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벗에게 쓴 편지와 가족에 대한 얘기가 좋았어요. 섬 님 마음에도 좋은 느낌으로 남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