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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레시피 - 39 delicious stories & living recipes
황경신 지음, 스노우캣 그림 / 모요사 / 2011년 5월
평점 :
좁은 방에서 어깨를 맞대고 앉아, 버너에 불을 붙이고, 코펠에 물을 받아 팔팔 끓이고, 밀가루 반죽을 조금씩 뜯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수제비. 도대체 무슨 맛이 있었겠느냐마는 나는 지금도 그 뜨거운 국물 맛과 부드러운 밀가루의 맛을 기억해낼 수 있다. 그것은 아주아주 슬픈 날, 눈물을 펑펑 흘리고 난 후, 누군가가 잡아준 따뜻한 손처럼 다정했다. 근본적으로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우리는 폭신한 이불에 싸인 아기처럼 순해져서, 그날 밤 어느 때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물과 밀가루와 소금으로 만든 그 초라한 수제비 속에는, 비바람 치는 날 동굴 속에 웅크리고 모여 앉아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아기곰들의 천진한 우정 같은 것이 녹아 있었다는 생각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떠올랐다. (pp.24-5)
인간의 오감 중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미각이 제일 오래 남는 것 같다. 그토록 좋아했던 첫사랑 남자아이의 얼굴도 목소리도 이제는 가물가물 하고, 처음 잡았던 손의 촉감도 기억나지 않고, 향기도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의 맛이나 친구들과 나누어 먹은 과자나 아이스크림의 맛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방금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월간 <페이퍼>의 편집장이자 다수의 책을 쓴 황경신의 음식 에세이 <위로의 레시피>를 읽고 있자니 내 기억 속의 음식 이야기가 몽글몽글 떠올랐다.
중학교 때 하교길마다 절친과 '아시나요'라는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곤 했다. 다른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꼭 '아시나요'만 먹었는데, 그 아이스크림이 다른 아이스크림보다 싸기도 했고, 빵처럼 생겨서 나눠 먹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친구가 조성모의 팬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가족 휴가 때 목포에서 먹은 화끈한 낙지볶음과 연포탕, 아버지가 직장 근처에서 사주신 어국수 맛도 좋았다. 지금도 가족들이 모이면 그 때 먹은 음식들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곤 한다.
대학교 때 선배가 사주었던 학교 앞 명물 오레오 쉐이크 맛은 지금도 여름만 되면 떠오른다. 오레오 과자를 쉐이크와 함께 갈고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만든 음료인데 후배나 친구들한테 사주면 늘 반응이 좋았다. 동생과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떠난 일본 여행 길에 시모키타자와의 허름한 골목에서 동생과 나누어 먹었던 카레빵과 우롱차 맛도 잊을 수 없다. 중국 여행길에 연변에서 먹은 북한식 냉면과 만두, 봉사 활동을 간 곳에서 비를 쫄딱 맞고 우여곡절 끝에 시장통에서 친구와 사먹은 찐빵 맛도 최고였다. MT 단골 메뉴인 삼겹살과 불조절에 실패해 불어터진 라면, 처음으로 친구들끼리 떠난 기차 여행길에 사먹은 춘천 닭갈비 맛도 잊을 수가 없다. 아, 나한테 추억의 음식이 이렇게도 많았다니...!
떠오르는 음식의 가짓수만큼 나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하다. 이렇게 한번이라도 어깨를 맞대고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들은 기억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 것 같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니라 함께 먹은 음식의 맛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사람과는 꼭 같이 밥을 먹어봐야 하나보다. 달콤한 밥알을 꼭꼭 씹어 넘기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소중한 시간을 보낸 추억을 마음에 꼭꼭 새겨두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