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잉글리시 - 영어를 삼킨 아시아, 표준 영어를 흔들다
리처드 파월 지음, 김희경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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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 사람들은 아시아권 사람들이 쓰는 영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관심으로 고른 책인데 마침 카이스트에서 연이어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 중 하나가 '100% 영어강의' 가 아니냐고 지적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본의 아니게 시사 이슈와 맞아떨어진 덕분에 평소보다 진지한 태도로 읽었다.

저자 리처드 파월은 법학자 겸 언어학자인 영국인으로 일본에 체류하던 중에 간판이나 홍보물, 안내문의 잘못된 영어 표기는 물론, 잘 알아보고 만들었을 브랜드명마저 (가령 '포카리 스웨트'는 땀(sweat)을 마신다는 뜻으로 들린다고) 이상한 영어 표현을 쓴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인의 생활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그들이 사용하는 영어의 가짓수는 늘거나, 아예 새로운 영어식 조어를 만들어 쓸 정도였다. 이에 영감을 얻어 25년간 아시아에 거주하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언어인 영어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자랑스럽게도(!) 한국의 사례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저자가 주로 생활한 곳이 일본이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필리핀, 타이, 미얀마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연구했는데도 한국의 사례가 많다는 것은 곧 한국 내의 영어에 대한 열기가 다른 나라에 비해 높고, 그만큼 특징이 두드러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내용에 대한 사례로 등장한다. (슬프게도 그의 지적은 사실이다.) 영어 사교육 열풍부터 '넘버 원', '프리미엄' 등 경쟁이나 비교의 뜻을 담은 말에 집착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저자가 한국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언어를 보면 그 나라의 문화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외래어까지도 한국 문화의 부정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한국의 초등학교에서는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치지만 74퍼센트에 이르는 학생들이 1,2학년부터 영어 사교육을 받는다. ... 이 조사에서 눈에 띄는 점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 교육을 시작한다면 영어 사교육에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쓸 것이라는 학부모들의 응답이다. "내가 영어에 미쳐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만난 젊은 한국 아버지가 말했다. "그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을 뿐입니다. 다 영어 과외를 시켜요. 영어를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도 얻거든요. 그리고 학교에서 하는 교육 수준은 믿을 수가 없어요. 내 아들을 학원에 안 보내면 다른 아이들한테 뒤처져요." (p.55)

한국에서도 나는 약간 이상한 영어 자막이나 내레이션이 흐르는 광고들을 봤다. 가령 "넘버원 이미지(이미지가 어떻게 '넘버 원'이라는 걸까? 그리고 한국인들은 왜 '넘버 원'이라는 표현을 좋아할까?)라던가 "프리미엄 버거, 빅 태이스티(...)" ... "프리미엄 디지털 카메라 : 한국의 광고 제작자들은 '프리미엄'이라는 말을 유난히 좋아한다)" 같은 말들이다.(pp.104-5) 

 

저자는 영어가 아시아권에서 가지는 '파워' 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여기서 '파워'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이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격차나 차별까지도 포함한다. 사실 아시아 국가들이 고유의 언어를 버리고 영어를 강조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저자가 이 연구를 하게 된 것 역시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부자 학교와 가난한 학교의 격차는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아시아에서는 유달리 커 보인다. 급속한 산업화와 중산층의 교육에 대한 집착 탓이다. 그 격차는 영어에 대한 접근성의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서울 강남구의 서울대 진학률은 다른 지역보다 최고 아홉 배나 높다. (p.195) 

 

영어의 파워는 국가간의 힘의 상징일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많은 격차를 야기한다. 전에는 '영어를 잘 하는 사람 vs 못 하는 사람'의 대결이었다면, 이제는 '영어를 어릴 때부터 배우는 사람 vs 성인이 되어서야 배우는 사람', '외국에서 배우는 사람 vs 국내에서 배우는 사람'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영어 실력은 경제력의 차이를 낳고, 이는 자식들의 교육 접근성 차이로 이어지며 격차를 대물림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영어 학습지만 구독해도 유별난 집, 부모가 극성 맞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는 이른 아침부터 영어유치원 버스에 오르는 '케이트', '조나단'을 만날 수 있을 정도다. 저 아이들과 같은 세대인 아이들은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아이들이 서로 의사소통이나 될까? 

뿐만 아니라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학가 100% 영어 강의 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한국의 사례는 나오지 않지만, 굳이 고급 학문을 다루는 대학 수업을 영어로 강의할 필요가 있는가, 필요하다면 과연 대학 자체의 국제화는 얼마나 진행되었는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 대학들은 영어로 진행하는 자체 수업도 새로 열고 있다. 태국 고등교육위원회에 따르면 대학에서 2008년 현재 영어로 가르치는 국제 프로그램은 727개다. 학교들은 '국제적'이라고 내세우지만 태국 학생 비율이 99.8%로 압도적으로 많다. (pp.172-3)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영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오로지 '목적'으로만 생각하는 잘못된 태도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영'어'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영미권의 문학을 공부하는 '영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아시아인이 줄고, 인도나 필리핀의 고급 인력들이 자국 산업의 발전을 위해 일하지 못하고 영미권 기업의 전화상담원 역할만 하고 있으며, 아시아 국가들의 영어 교육 열기를 이용하여 미국이나 영국에서 언어연수 등을 명목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영어 광풍의 이면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영어가 다른 언어를 희생시키며 확산되는 '킬러 언어'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치더라도, 이를 이용하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격차가 더 심해지는 이면을 놓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학 전공자가 아니고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영어 교육의 현주소에 대해 생각해보고 올바른 언어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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