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만세
남규홍 지음 / 도모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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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나는 한국인이다' 시리즈 <출세만세>편을 제작한 남규홍 PD가 방송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쓴 책이다. 마침 나도 이 방송을(전부를 보지는 못했지만) 재미있게 본 터라 이 책도 읽게되었다.

 

 


한국인은 성공과 출세라는 말을 구분해서 쓰는데 익숙하지만 외국인은 성공이라는 말만 유용하다.

그들은 크게 성공하나 작게 성공하나 그냥 성공이다.

출세가 내포한 은밀한 촉수를 출세라는 말이 불러온 정서적 공감을 외국인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pp.7-8)

 

 

정치외교학, 경제학 전공자로 주변에 고시,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서인지 책의 내용이 참 절절하게 다가왔다. 1학년때부터 고시 공부를 하느라 학교는 뒷전, 부모님이 맞벌이로 번 돈으로 고시원 생활비와 학원비, 교재비를 대는 친구들도 많았다. 언젠가 그런 고시생 친구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너가 복수전공도 하고, 대외활동도 하고, 알바도, 여행도 하는게 참 부러웠다'고 말했을 때, 그 친구가 참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고시에 매달리는지 묻고 싶은 마음도 들었었다. (그 친구는 아직도 공부 중이다)

 

하지만 이 책 <출세만세>를 읽으면서 그 친구 또한 '출세'라는, 한국인들이 취해있는 환상 혹은 풀지 못하는 족쇄에 걸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하고 싶다'고 하면 담담하게 들리는데, '출세하고 싶다'고 하면 어딘지 속물적이고 권력을 추구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큰 부를 이룬 자산가나 연예인, 스포츠 선수가 '성공'했다고는 말하지만 '출세'했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 한국 사회 특유의 개념인 '출세'에는 KS라인, 고시패스, 판검사 임용, 정계진출 같은 '공권력'의 의미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권력'의 이미지라는 것은 몇 십년 전 까지만 해도 군사독재와 민주화탄압 같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출세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위압적이고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출세라는 것도 남이 하면 부정적인 느낌이지만 내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수많은 한국의 부모님, 선생님들이 오로지 자식들, 제자들의 출세만을 바라며 뒷바라지를 한 것이고, 어른들 뜻을 거스를 줄 모르는 착한 자식들은 명문대 합격, 고시패스만이 인생의 정답인양 묵묵히 공부했다. 그래서 패스하면 단박에 효자, 효녀, 못하면 불효자, 불효녀가 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부모 자식 사이다.

 

저자인 남규홍 PD 또한 출세의 환상으로부터 멀었던 분은 아닌 것 같다. 책 앞부분을 보면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고시준비를 하다 현재는 PD가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고법' 출신에 고시 준비까지 하다가 PD가 되었으니 <출세만세>라는 프로그램이 PD님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을지 짐작이 간다.

 

*** 과거에는 고시 합격자들이 쓴 책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김난도 교수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처럼 고시 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 다른 길로 돌아선 사람들의 책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도 성공의 의미가 달라진 증거가 아닐까 싶다.  

 

 


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는 한국인의 출세 욕구가 강한 것은 살아가면서 출세 외에 추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사회가 출세를 대체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했을 때 조선시대 등 과거에는 대체할 것이 있었다. 이른바 '명예'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출세를 포기할 만한 훌륭한 가치가 남아 있지 않다.

... 우리는 종교도 기복종교이고 출세를 위한 것이지 고유의 종교행위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

기도 많이 하면 합격하고 기도가 불성실하면 승진에서 누락시키는 그런 자비 모르고 사랑 없는 절대자를 어찌 믿을까 (p.136)

 

 

이 책에는 출세의 이유와 의미, 법칙, 완성에 대한 방송 내용과 제작진의 후기가 총 4부에 걸쳐 담겨 있다. <출세의 이유>편에서는 방송 당시 큰 화제를 모았던 '완장촌'의 제작 동기와 촬영 당시의 일화들, 후기 등이 나온다. 다른 다큐멘터리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형식으로 권력의 속성과 한국인들의 권력에 대한 생각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재미있었다.

 

<출세의 의미>편에는 부모들의 학력도 낮고 가난한 시골마을 '야소골'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 이유를 추적한 내용이 나온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있듯이 한국사회는 유독 어려움을 딛고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들에 대한 '신화'가 많다. 하지만 마을 최초로 행시에 패스하여 큰 기쁨을 주었던 아들이 몇 년만에 과로사한 송무개 할머니의 이야기, 한의사, 변리사 자식을 두고도 '고시 합격'을 못했다며 마땅찮아 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국의 교육열은 국가 차원에서는 플러스 요인이었을지 몰라도, 개인에게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한두 세대 만에 이룬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경험한 놀라운 계층이동은

누구든 노력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희망의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주된 통로는 교육이었고 최종 목적지는 고시합격으로 상징되는 '완장'차기였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점차 그 이동의 문이 닫혀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 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닭들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혼란스럽지만 역동적 모습이 완장촌의 풍경이었다면

앞으로 우리는 소가 닭 보듯, 그리고 닭이 소 보듯 하는 절망적인 양극화된 사회로 진입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p.93)

 

 

<출세의 법칙>편에는 출세의 요인과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적, 운(관운) 등 수많은 요인들이 출세를 좌우한다고 말하지만, 제작진이 주목한 것은 출세의 요인 자체보다는 그 변화였다.

 

과거의 출세는 자수성가, 개천 용으로 대표되며, 교육, 돈, 고시, 정치권력 중 하나만 갖추어도 가능했지만, 현재의 출세는 명문가, 재계 혼맥 등으로 이루어진 신흥 귀족계급으로 진입하는 것이고, 교육, 돈, 고시, 정치권력 중 하나로도 부족하여 '이중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 그러고보면 우리 사회는 이승기, 김태희, 엠마 왓슨 등 연예인이면서 공부까지 잘 하는 스타들에게 더 큰 찬사를 보내는 것 같다. 그러면서 공부만, 일만 잘 하기에도 벅찬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과거보다 현재는 출세하기가 더욱 힘들고, 미디어에 나오는 출세한 사람들(정치인, 연예인, 재벌 등)과 나를 비교하며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좌절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마지막 <출세의 완성>편에는 박용만 두산 회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유시민 전 장관, 이인제, 김홍신, 박원순, 정형근 등 출세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인터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출세'했지만, 모두가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니다. 분명 이 책에 실릴만큼 '외적으로는' 잘난 사람들인데도 세간의 평가에 대해 변명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중에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직위에 있었지만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일을 한 적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대단한 사람들의 입에서조차 출세가, 부와 명예가 봄날의 꿈처럼 느껴진다는 말이 나오다니. 과거의 출세가 이런 식으로 저물어가고 있고, 현재의 출세 공식에도 내 상황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뭔가를 찾아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본인에게 달렸다.

지금 시대에 출세한 사람들의 길은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분야를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열정을 다해 달렸을 때 찾아온다.

우리 시대의 별이 된 사람들도 그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자기가 좋아서 간 길을 오래도록 묵묵히 걸어가서 마침내 출세할 수 있었다.(p.252)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제작 후기라는 특성상 한국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는 르포성이 짙은 책이지만, 책 중간 중간에는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힌트도 조금씩 숨어 있다.

 

'출세'는 '나만 잘 되면 땡'이 아니라 가족, 친척, 가문, 동네, 학교, 국가를 빛내야 비로소 성공이라는 뜻이 담긴 말이지만, 요즘 세대가 추구하는 '성공'은 서구의 의미 그대로 무언가를 추구하여 달성하는 것 그 자체일 뿐이다. 세상에 공헌하겠다는 뜻을 품어야 성공이 아니라, 성공 그 자체가 세상에 공헌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각광을 받지도 못했을 박지성, 김연아, 박태환 같은 이들이 현 시대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명문대에 들어가고, 모두가 공무원, 고시 패스를 해야할 필요는 없다. 상인은 물건을 잘 팔고, 학자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기술자는 열심히 연구하고, 예술가는 창작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곧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일이고 성공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평생 농부로, 상인으로, 회사원으로 제자리에서 열심히 산 어른들이 우리 사회에는 훨씬 많고, 그 분들이 실제로 이 사회를 지탱하셨으며, 이 책에 나온 출세한 '개천의 용'들은 사회의 극히 일부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제까지 그분들에게까지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60년대에나 2011년 현재나 여전히 재벌가 프린스와 평범녀가 사랑에 빠지는 판타지가 인기를 끄는 것이다.
 

비단 출세, 성공을 바라지 않더라도, 삶의 의미, 사람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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