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료한 일상, 따분한 나날들. 하루하루가 늘 똑같이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서 한국, 아시아, 나아가 세계 전체로 보면 하루 동안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는 일어나고 있다. 하물며 하루가 아니라 한 주, 한 달, 일 년, 그리고 한 세기 동안 일어나는 재난은 얼마나 많을까. 당장 기억나는 사건만 해도 불과 며칠 전 일본 오키나와에서는 지진이 일어났고, 일주일 전 대만에는 큰 홍수가 났다. 중국 쓰촨성 지진, 인도네시아 쓰나미 피해, 미국 카트리나 지방의 해일 피해 등 큼직한 재난 사건들은 모두 겨우  몇 년 안에 일어났다. 그나마 지금은 자연 재해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자료도 있고, 재난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국가적인 경보 및 복구 시스템도 마련되어 있으며, 일반인들 또한 재해에 대한 몇 가지 상식쯤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18세기 유럽, 종교의 힘이 우세하고, 국가의 기초적인 역할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유럽의 대도시에서 지진과 해일, 화재가 동시에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니콜라스 시라디의 <운명의 날(the Last day)>은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대지진에 대한 보고이자 분석이 담긴 책이다. 책에 의하면 리스본 대지진의 피해는 어마어마했으며, 유럽 전역이 혼돈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거대한 재난 앞에  '신께서 노하셔서 이런 재앙을 내리셨다'며 속죄하느라 복구하는 데에는 정신을 쏟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 주제 1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총리 카르발류는 다른 생각을 품었다. 지금이야말로 종교에 종속되어있던 포르투갈을 강력한 왕권 국가로 탈바꿈시킬 기회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리스본을 재건하기 위해 대형 건축 공사를 감행했고, 다른 유럽 국가에 널리 퍼져있던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대학을 국가와 연계하여 교육을 부흥시키고, 그 동안 배척해온 유태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을 자국민으로 흡수했다.

 

 

한 나라의 수도가 삽시간에 폐허로 바뀌었는데도 침착하게 나라의 안위를 살피고 자신의 할 일을 계획한 카르발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총리답다. 비록 그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치가 후에 공포정치로 변질되기는 했지만, 카르발류는 위기에 빠진 포르투갈을 성공적으로 재건했고, 지진 피해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리라고 보았던 유럽 전역의 차가운 시선을 가볍게 날려버렸다. 오죽하면 주제 1세 사후 급속히 퇴행한 포르투갈의 정치 및 경제 상황에 비하면 카르발류의 철권 정치는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일까. 이 책은 리스본 지진이 일어나기 전 카르발류의 행적과 지진 이후 총리로서의 과감한 개혁을 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리스본 지진이라는 사건을 다룬 책이라기 보다는 카르발류라는 인물에 대한 책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운명의 날>이라는 제목은 모호하고 막연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카르발류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1755년 11월 1일 아침 9시 30분, 첫 진동이 리스본을 강타했다. 이어 세 번의 지진과 해일, 화재가 발생해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던 국제도시 리스본을 하룻밤 사이에 폐허로 만들었다. 기독교 최고의 축일 만성절에 일어난 대재앙이었다. 이 참사는 곧 전 유럽을 경악시켰다. 볼테르, 칸트, 루소 등 유럽 당대의 지식인들은 신의 섭리로 세상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낙관주의를 버리게 되었으며, 자애로운 신이 세상과 인간을 주관한다는 그동안의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책 서문 中)

 

지진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지만 한편으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다. 카르발류도 그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 "정치를 통해서만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 한 제국의 운명을 바꾸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때로는 이런 자연재해가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재해를 통해 제국을 갉아먹는 노후한 제도들이 뿌리째 뽑히기도 한다. ... 포르투갈 전역이 황폐해지고 도시들이 파괴된 것을 우리들의 몽매함을 일깨우고 국가를 혁신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재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p.136 황금시대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