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안경을 썼다.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지금은 안경을 벗으면 글자는커녕 눈 앞에 놓인 물체의 형체마저도 희미하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종종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시각 대신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다른 감각에 의존해서 사는 상상을 한다. 잘 살 수 있을까? 쉽게 답이 안 나온다.

 

 

나만 눈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나만 눈이 보인다면 어떨까?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은 '만약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어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게 된다면'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갑자기 눈이 멀이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 '백색 공포' 가 삽시간에 지구 전역에 퍼지고, 실명에 따른 공포와 좌절감으로 인해 폭력과 범죄가 만연한다. 그런데 '의사의 아내' 만은 눈이 멀쩡해 세상의 모든 비극과 참상을 목격한다. 처음에 나는 그녀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온 세상을 강타한 공포로부터 혼자만 비껴갔다니 축복이 아닌가. 하지만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나만 눈이 보이는 상황은 행운이 아니라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이해와 공감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건 죽느니만 못한 비극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건 고도의 상징과 비유인 것 같다. 내 눈엔 똑똑히 보이는 진실 혹은 진리를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상황, 보았으나 눈감는 상황은 현실에서 왕왕 벌어지는 일이다. 이를테면 내 눈엔 보이는 불쌍한 사람을 그 누구도 발벗고 돕지 않는다든가, 역시 내 눈엔 뻔히 보이는 불의를 역시 그 누구나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상황 말이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나는 보이는 것을 보인다, 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보니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 그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에 대해 물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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