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식료품점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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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태어나 보니 이런 성별, 이런 국적, 이런 피부색, 이런 외모 등등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성별, 어떤 국적, 어떤 피부색, 어떤 외모라는 이유로 차별한다. 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해 종교적 교리나 정치적 정당성을 들먹이기도 한다. 전미도서상 수상 작가 제임스 맥브라이드의 소설 <하늘과 땅 식료품점>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197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포츠타운에서 해골 한 구가 발견된다. 경찰은 해골의 신원과 사건의 경위를 알아내기 위해 마을에서 오래 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 이 과정에서 한 노인이 조사를 받는데, 그는 경찰에게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문제의 사건은 그로부터 40여 년 전인 1930년대에 일어났다. 그 때 이 마을에는 모셰와 초나라는 유대인 부부가 살았다. 모셰는 2차 대전 때 홀로코스트를 피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출신으로 자수성가해 극장을 여러 개 소유하고 있다. 초나는 원래 이 마을 출신으로 다리에 장애가 있고 매우 독실하며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라는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한다.


모셰와 초나는 그 시절에는 드물게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들이다. 특히 초나는 더 큰 목적에 봉사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손해를 감수하고 때로는 위험을 불사하면서까지 이웃들을 돕는다. KKK단이 마을에서 기승을 부리자 그들을 비판하는 글을 마을 신문에 내기도 한다. 모셰는 이런 초나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걱정하는 마음도 크다. 아니나 다를까, 초나는 주 정부에서 추적하고 있는 소년을 자신들의 집에 숨겨주자고 한다. 모셰는 처음에 반대했지만, 초나의 의지가 워낙 굳은 데다가 모셰 또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소년을 숨겨주기로 한다. 그들의 용기에 감복한 주변 이웃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소년을 숨겨주는 일을 거든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지만, 피부색이나 종교, 계급, 장애 등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고 차별 때문에 고통받는 이런 모습은 지금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인 초나의 선택이나 발언, 행동들이 더 용감하고 위대하게 느껴졌다(초나가 내리는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선택의 근거가 가장 보수적이고 정통인 성경에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는 지점이다). 나라면 장애를 가지고 있고 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차별을 당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인종 분리 정책이 유효하던 시대에 흑인 소녀와 친구가 되고, KKK단에 맞서 싸우고, 당국이 추적 중인 소년을 숨겨주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초나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를 내어 선(善)을 실천한 결과 모두가 원했던 결말보다 더 나은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도 좋았다. 지금 당장 나 혼자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조금씩이나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선을 실천하다 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실천한 선과 연결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결말이랄까. 요즘처럼 절망의 끝에는 더 큰 절망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절에 읽으면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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