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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말 - 사회적 계급의 성찰과 자전적 글쓰기의 탐구 ㅣ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아니 에르노.로즈마리 라그라브 지음, 윤진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1월
평점 :
<아니 에르노의 말>은 2022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와 프랑스의 사회학자 로즈마리 라그라브의 대담집이다. 국내에 나온 아니 에르노와 관련된 책은 다 읽어서 새로운 내용이 있을까 싶었는데,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가 여러모로 비슷한 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아서 그런지 흥미로운 대목도 많고 새롭게 생각해 본 점도 많았다. 최근에 나온 책이기도 하고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많기 때문에 아니 에르노 입문서로 읽기 보다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다 읽은 후에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둘 다 사회적 계급의 성찰과 자전적 글쓰기의 탐구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작가 모두 노르망디의 시골 가정 출신이고, 교육을 계층 상승의 기반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계급 변화가 페미니스트로의 이행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두 작가는 이를 가정 환경과 종교의 영향에서 찾는다. 아니 에르노는 소매점을 운영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가톨릭 신앙이 지배하는 집안에서 11남매 중 한 명으로 자랐다. 아니 에르노는 외동딸을 잘 키우고 싶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반면,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가난한 부모의 지원을 받으려면 남자 형제들과의 경쟁에서부터 이겨야 했다.
아니 에르노는 외동으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나'라는 주체에 대한 인식이 자연스러웠지만,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여러 형제들의 틈바구니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를 주장하는 건 이기적이고 편협한 행동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글을 쓸 때에도 주어를 '나'로 설정하는 것조차 불편하고 어색했다. 가정 환경 또는 형제 관계가 주체에 대한 인식에 미치는 영향이 실제로 있는지 궁금하고(작가 중에 외동이 많을까 어떨까), 아니 에르노가 그토록 대담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경험담을 글로 써서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 어쩌면 그의 가정 환경과 형제 관계 덕분이라고 생각하면 흥미롭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계급의 성찰과 자전적 글쓰기의 탐구를 시도한 작가로 분류되지만, 피에르 브르디외나 디디에 에리봉 같은 남성 작가들은 무의식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젠더의 영향(특혜)을 간과한다고 지적한 대목도 흥미로웠다.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둘 다 '여자는 공부 많이 할 필요 없다', '대학 가지 마라', '시집이나 잘 가면 그만이다' 같은 편견과 싸워야 했던 반면, 남성 작가들은 그러한 편견을 상대할 가능성이 낮다.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도 적다. 여성 독자에게 여성 작가의 글이 더 공감되고, 더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