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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투 파라다이스 1~2 세트 - 전2권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23년 12월
평점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인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권력자, 자본가 등의 주류, 강자, 다수자 중심으로 서술된다. 그렇다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비주류, 약자, 소수자들 같은 '패자'의 이야기는 어디로 갈까. 이들의 이야기가 문자 이전의 시대에는 노래나 구전 설화로, 문자 이후의 시대에는 문학(+문학에서 파생된 연극, 영화, 드라마, 만화 등)으로 전해져 왔고 전해지고 있다는 데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2015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 <리틀 라이프>로 뒤늦게 한국에 알려진 작가 한야 야나기하라의 최근작 <투 파라다이스>는 역사의 한계를 보완하는 문학의 역할을 새삼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워싱턴 스퀘어>는 19세기 후반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의 소설 <워싱턴 스퀘어>에 기반한 대체 역사 소설이다. 19세기 말 '자유 주'로 불리는 미국의 일부 주에서만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자유 주 출신의 은행 가문 상속남 데이비드는 가난한 음악 교사인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진다. 마찬가지로 게이인 데이비드의 할아버지 너대니얼은 '동성 결혼은 괜찮지만 가난한 남자와의 결혼은 안 된다'며 손자를 말린다. 에드워드는 데이비드에게 할아버지 곁을 떠나 미국 서부로 가자고 제안하는데, 자유 주가 아닌 서부는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데다가 데이비드가 할아버지와 헤어지면 자기 몫의 유산을 포기해야 한다. 과연 데이비드는 어떤 선택을 할까. (솔직히 2부, 3부보다 1부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2부 <리포-와오-나헬레>는 1993년 뉴욕에서 법률 보조원으로 일하는 (또 다른)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그린다. 데이비드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몰락한 하와이 왕조의 후손이다. 왕조가 이어졌다면 데이비드가 왕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데이비드 자신은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없고 미련도 없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친구인 에드워드는 데이비드가 하와이 왕조의 후손임을 안 순간부터 그를 중심으로 하와이 왕조를 재건하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3부 <8구역>은 팬데믹이 일상화된 근미래에 인구 수 감소를 이유로 동성 결혼이 다시 금지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작가가 3부를 구상하고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 19 확산 이전이라고 하니 놀랍다.)
각각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주인공이 불편을 감수하고 확실한 현재를 살아가는 대신 불안을 끌어안고 불확실한 미래를 택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택하는 불확실한 미래가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약속하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회가 아니라 현재보다 더 폐쇄적이고 퇴보한 사회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선택지가 펼쳐져 있고 더 큰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보수화 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을 그러한 상태로 내몰고 있는 현대 사회를 비판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