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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1933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는 장애가 있는 아들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인슈타인이 극찬한 천재였던 에렌페스트는 나치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과 장애인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이면서 장애인인 아들의 미래를 비관했다. 하지만 그뿐일까. 에렌페스트가 속한 물리학계에선 몇 년 전부터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의 위상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고전물리학을 신봉해 왔던 에렌페스트는 자기 비판과 열등 의식에 시달렸다. 여기에 나치의 반유대주의와 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그의 불안과 우울 증세는 더욱 더 심각해졌는데...
2021 부커상 최종 후보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신작 장편 소설 <매니악>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은 한 부에 한 명씩, 총 3부에 걸쳐 세 명의 천재들을 소개한다. 1부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이고, 2부의 주인공은 헝가리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존 폰 노이만이며, 3부의 주인공은 (무려!!) 한국의 전직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이다.
2부의 주인공 폰 노이만은 1부의 에렌페스트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천재였지만 삶의 양태는 사뭇 달랐다. 고전물리학의 대가였지만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에렌페스트와 달리, 폰 노이만은 전공인 수학 외에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드러내며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에도 나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했으며,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는 그 유명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축으로 일하며 오늘날 대부분의 컴퓨터 설계의 기본으로 여겨지는 초기 형태의 컴퓨터를 만들었고 이를 '매니악(MANIAC)'이라고 불렀다.
1부와 2부는 작가의 전작인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와 마찬가지로 인물에 초점을 맞춘 반면, 3부는 인물이 처한 상황 자체를 중점적으로 그린다. 그 상황이란 한국인들도 널리 아는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간의 대결이다. 이세돌은 당시 알파고를 상대로 다섯 번의 대국에 임해 네 번의 패배와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폰 노이만이 개발한 초기 컴퓨터를 기반으로 급속도로 발전한 인공 지능 기술이 그것을 만든 인간의 지능을 넘어섰음을 보여준 동시에, 인류 역사가 파국에 다다르고 있다는 (에렌페스트를 좌절시킨 바로 그) 예감을 더욱 짙게 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뿐일까. 바둑의 본질은 재미를 얻기 위해 하는 게임인데 인간인 자신은 바둑을 두면서 재미를 느끼는 반면 알파고는 그렇지 못하다는 요지의 이세돌의 말을 읽으며, 나는 결국 (기계와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이 재미이며 재미를 느끼는 한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세돌은 또한 알파고와의 대결을 통해 그동안 바둑계에서 당연시했던 수들을 관습적으로 느끼게 되었으며 앞으로는 훨씬 더 참신한 수들이 더 많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마치 고전물리학의 종말로 여겨졌던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더 큰 발전을 이끈 것처럼, 인류의 위기로 여겨지는 문제들이 역으로 인류에게 기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