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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어느 도시의 중앙역에는 밤마다 다양한 연령대의 노숙인들이 모여 든다. 이들은 매일 밤 익숙한 모습으로 역에 나타나 익숙한 자세로 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런 노숙인들 중 한 명이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나'는 비록 지금은 자신이 노숙을 하는 처지이지만, 자신은 주변의 노숙인들과 다르다고, 아직 젊고 건강하니 조만간 이곳을 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한 여자가 나타난다. 언제나처럼 박스를 깔고 누워 잠을 청하던 그를 깨우며 쥐가 있다고, 도와 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사라진다. '나'가 끌고 다니던 캐리어도 보이지 않는다.
<중앙역>은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불과 나의 자서전> 등을 발표한 소설가 김혜진이 2014년에 발표한 첫 책이자 첫 장편소설이다. 선의로 하룻밤을 함께 보내준 여자가 자신의 캐리어를 가지고 도망친 것을 알게 된 '나'는 거리를 헤매고 또 헤매다 결국 여자를 찾아낸다. 처음에 '나'는 자신에게 단 하나 남은 것을 가져간 여자에게 분노를 느끼지만, 늙고 병든 여성의 몸으로 노숙인의 삶을 살고 있는 여자에게 점점 연민을 느끼고 이 감정은 사랑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나'도 여자도 사랑을 하기에는 조건이 열악한 정도가 아니라 암담하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위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중앙역에 모이는 노숙인들을 지원하는 강팀장에게 부탁해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게, 재개발 지역의 철거 용역으로 일하며 원주민을 쫓아내고 농성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것이다. 돈이 급한 '나'는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돈을 번다. 그렇게라도 여자와 함께 살 집을 구해서 오순도순 살아갈 꿈을 꾸지만, 여자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한다. "누군가에게는 삶이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중략) 그러면서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정말 끔찍한 건 삶이 아니라 죽지 않고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스스로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262쪽)
이 소설은 점점 더 비참한 상태로 추락하는 '나'와 여자의 모습과는 반대로 공사를 거듭하며 점점 더 거대해지고 화려해지는 중앙역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한다. 집이 없어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나'가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을 쫓아내는 일로 돈을 버는 상황 또한 모순적이다. 김혜진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으로부터 야기되는 문제들과 일이 개인에게 미치는 정신적, 사회적 가해를 꾸준히 그려왔는데, 이러한 점들이 데뷔작 <중앙역>에서도 엿보인다. 1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유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