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본 것 - 나는 유해 게시물 삭제자입니다
하나 베르부츠 지음, 유수아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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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리는 거대 미디어 대기업의 하청 업체인 '헥사'에서 콘텐츠 감수자로 일하고 있다. 말이 좋아 '콘텐츠 감수자'이지, 실상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플랫폼에 올라오는 모든 게시물과 이미지, 영상들을 직접 모니터링 하면서 성적, 인종적, 정치적, 종교적 등등의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업무 시간 내내 끔찍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봐야 하는 데다가 화장실에 갈 시간도 넉넉히 안 주는 회사 규정 때문에 피곤하기는 하지만 케일리는 행복하다. 고객들의 폭언에 시달리며 고강도의 감정 노동을 해야 했던 이전 직장에 비하면 지금 직장은 대면 업무도 없고 보수도 높기 때문이다.


헥사에서 케일리는 애인도 만났다. 강도 높은 업무를 마친 후 동료들과 술 한 잔 하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정해진 일과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케일리는 시흐리트에게 눈길이 갔고 시흐리트 역시 케일리에게 호감을 보였다. 결국 둘은 연인 사이가 되었고 한 집에서 지내며 더욱 더 가까워졌다. 어느 날 케일리는 시흐리트의 아름다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자신은 별볼일 없었는데, 이제는 괜찮은 직업도 있고 마음을 터놓고 사귀는 친구들도 있고 매력적인 애인도 있다. 그러니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더 열심히 일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때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네덜란드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인 하나 베르부츠의 소설 <우리가 본 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노동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케일리는 일견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인다. 낮에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친구들과 놀거나 애인과 사랑을 나누며 무난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의 일과에는 현대 사회의 폐해와 모순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일단 그가 일하는 헥사는 대기업 하청 업체로 겉보기에는 번듯해 보이지만 직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인 데다가 노동 조건은 가혹하기 그지 없다.


케일리의 업무는 플랫폼에 올라오는 콘텐츠의 유해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케일리를 비롯한 콘텐츠 감수자들은 하루 종일 동물 학대, 자해, 혐오 표현 등을 접하며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모든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다'는 혐오 표현이지만 '모든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다'는 혐오 표현이 아니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규정도 그들을 괴롭게 만든다. 이들 대부분은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거나, 문제를 자각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이직을 단념한다. 대부분의 직업이 AI로 대체되는 것이 시간 문제인 상황에서 비판이나 항의는 언감생심이다.


부제가 '나는 유해물 게시자입니다'이기도 해서 이 소설이 유해물 게시자의 경험담 또는 체험 수기 비슷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내 예상보다 한두 걸음 더 나아간다. 업무상 유해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케일리와 그의 동료들은 일상에서도 혐오 표현을 서슴지 않게 되고, 도파민 중독 증세를 보이며, 대인 관계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미디어와 콘텐츠가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은 많아도 줄어들 가능성은 적기에 소설의 결말이 매우 끔찍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유해물 게시자 내지는 유포자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반성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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