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사랑과 혁명 1~3 세트 - 전3권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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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작가의 '백탑파' 시리즈를 좋아한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대소설의 시대> 이후 신작 소식이 없어서 작가님 근황이 궁금했는데, 2023년 9월에 신작 장편 소설 <사랑과 혁명>이 나온 걸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구입해 읽었다. 전 3권으로 구성된 대작인 <사랑과 혁명>은 19세기 초 전라도 곡성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옥사인 정해박해를 배경으로 한다. '백탑파' 시리즈와는 공간적 배경도 다르고 등장 인물도 다르지만, 시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무엇보다 조선 후기의 사상적 변화와 새로운 조류를 그린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느꼈다.


소설은 전라도 곡성 장선마을에 사는 젊은 농사꾼 들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관기였던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열 살 때부터 농사를 지은 들녘은 밤낮으로 농사 생각뿐인 천생 농사꾼이다. 그런 들녘이 마름의 횡포로 큰 빚을 지게 되고, 빚을 독촉하는 마름을 두들겨 팬 죄로 마을에서 쫓겨나기까지 한다. 도망자 신세가 된 들녘은 산에 사는 나무꾼 곡곰 밑에서 나무하는 법을 배우는데, 이 과정에서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소녀 아가다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들녘은 아가다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아가다의 흔적을 좇다가, 옹기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옹기촌인 줄로만 알았던 덕실마을이 실은 관에서 금지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숨어 사는 교우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과 혁명> 1권은 정해박해가 일어나기 전 들녘과 아가다의 만남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2권은 정해박해 당시 곡성 교우촌 교인들이 당한 박해의 내용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1권은 농사 밖에 모르는 소년이었던 들녘이 사랑을 알게 되고 신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일종의 성장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져서 비교적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에 반해 2권은 투옥된 교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지나치게 자세히, 지겨울 정도로 나와서 읽기가 힘든 면이 없지 않았다. 물론 당시 교인들이 실제로 당한 고문의 정도와 박해의 수위는 소설에 묘사된 것 이상이었을 테고, 작가는 그러한 역사의 폭력과 폐해를 현대의 독자들에게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1권과 2권을 읽으면서 이렇게 사회적으로 차별 받고 신체적인 고통까지 당하면서도 신을 믿고 종교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상당히 궁금했는데, 정해박해 이후를 그린 3권을 읽으면서 약간의 답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당시 조선 사회에서 피지배 계층으로 산다는 건 목숨이 지배 계층에게 달려 있다는 점에서 짐승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생명이 소중하고, 만인이 평등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를 접한다면, 그러한 종교를 따르며 선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혹하지 않기가 오히려 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2권에 묘사된 것처럼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 금세라도 배교할 것 같은데, 3권을 보니 이들에게 중요한 건 현생의 안락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현생 이후의 명예 또는 영생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영생은 물리적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한다. 소설에서 교인들은 숨어 지내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야기를 짓거나 노래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는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시대에 가본 적도 없는 나라에서 핍박 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선에 사는 이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결국 성경과 찬송의 형태로 전해진 이야기의 힘 덕분임을 이들이 알기 때문이다.


3권에서 교인들은 정해박해로 인해 교인들의 수가 크게 줄고 교세가 많이 꺾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신부를 모셔 오려고 노력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지만, 2024년 현재 이들이 믿었던 종교(천주교)는 대한민국에서 공인된 종교로서 다수의 신도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반면 이들을 박해한 조선 정부는 망해서 사라진 지 오래이며 앞으로 다시 부활할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보다 종교의 힘이 더 강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야기의 힘이 더 강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역사 소설인 줄 알았고 중간에는 종교 소설로도 읽혔지만, 결국 현재 어떤 이야기를 믿고 따르는 지가 미래를 만든다는 교훈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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