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저자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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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거나 비슷한 점 때문에 끌리는 사이도 있지만 다른 점 때문에 끌리는 사이도 있다. 차이를 거부나 단절의 이유로 삼는 대신 만남과 연결의 기회로 삼는다면 우리의 세계는 더욱 폭넓고 다채로워질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이길보라의 책 <고통에 공감하다는 착각>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집필된 산문집이다. 저자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 즉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이다. 장애인 부모를 둔 저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다른' 존재 취급을 받은 적이 많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 덕분에, 그 '다름' 덕분에 타인과 세상을 납작하게 보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연구에 따르면 산업 혁명 이전에는 장애라는 개념이 없었다. 신체의 일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거나 정신 능력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장애가 아니라 그 사람의 특질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고 노동에 적합한 표준화된 신체 개념이 생겨나면서 그렇지 못한 몸, 즉 노동할 수 없는 몸, 자본에 기여할 수 없는 몸은 장애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노동 불가'인 것은 아니다. 청각 장애가 있는 저자의 부모만 보아도 스스로 호떡과 와플 장사를 해서 저자 남매를 키워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친척과 이웃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이는 비장애인들의 삶의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다.


자라면서 저자의 관심은 장애 문제 외의 다른 문제로 옮겨갔다. 저자는 코다인 동시에 청년이고 여성이다.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는 백인 중심 사회에서 소수인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했다. 우울증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면서 우울증 문제와 무관하지 않게 되었고, 그 남성이 일본인이라서 국제결혼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출산을 앞두고 있으니 이제 곧 엄마로서의 정체성도 가지게 될 것이다. 장애, 청년, 여성, 유학생, 아시안, 국제결혼, 기혼 유자녀 맘... 어느 하나 쉽지가 않다. 사회적으로 약자, 소수자로 여겨질 만한 특징을 여러 개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은 약자성, 소수자성이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84년 저작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원시공산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이라는 제도가 생기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일처제가 생겼다고 말한다. 공동체 내에서 규율 없이 결혼하다가 형제자매 간의 성관계가 배제된 가족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모계제 사회가 정립되고 여성이 경제를 장악했다. 농경과 목축이 분리되며 생산력이 증대되고 그에 따른 잉여물의 교환, 사유재산이 생기며 지금과 같은 가부장제가 출현했다. 남성의 경제적 역할이 커지면서 생산 수단과 가축, 노예가 남성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남성에 의해 멸시당하고 남성 욕망의 노예이자 번식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일부일처제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즉 남성이 가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는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가 당연하지 않다는 거다. 약 5000종의 포유류 중 일부일처제를 채택한 동물은 3~5%에 불과하다. 인류 또한 사유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를 택했을 뿐이다. (143-4쪽)


저자는 자신의 약자성, 소수자성 덕분에 다른 약자, 소수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었다. 고통은 저자가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혹자는 창작자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들은 대부분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내려고 시도하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진정성을 더하는지, 당사자성에 기반을 둔 정체성과 주체성, 주도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기술과 기교보다 1인칭의 시점으로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103쪽)


정치는 정치인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양궁 국가대표 선수 안산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세상을 이롭게 바꾼다는 의미에서) 정치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디아스포라, 미등록 이주아동, 탈학교 조선인, 영 케어러, 환경 운동 등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한다는 말을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진정한 (자신의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이루어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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