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
양영희 지음, 인예니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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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코리안 영화감독 양영희의 영화는 아직 못 봤지만 그의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는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의 뒤를 이어 한국에 출간된 양영희의 책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는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요소를 더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재일코리안 2세로 태어나 조총련 활동가 부모 슬하에서 오빠 둘을 북한으로 보내고 외동딸 아닌 외동딸로 살았던 저자의 생애를 알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러므로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를 읽기 전에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부터 읽어보기를 권한다.


미영은 1964년 오사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코리안 여성이다. 조총련 활동가인 부모의 뜻에 따라 일본의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조선학교에 다니며 조선말을 배웠지만, 같은 나이대의 일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패션과 유행에 관심이 많고, 문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어 장차 극단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고교 졸업 후 미영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조총련 계열 학생들이 다니는 도쿄의 조선대학교에 진학한다. 하지만 미영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졸업 후 당이 배치한 직업에 종사하며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라는 소리를 들어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학교 행사에서 김일성 찬양 영화를 보던 미영이 그 영화의 구성이며 내용이 얼마 전에 본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히틀러 찬양 영화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냉소하는 대목이다. 일본에 사는 데다가 문화 예술 애호가라서 일반인보다 훨씬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미영의 눈에는 조총련 사회가 주입하는 사상의 모순과 한계가 뻔히 보인다. 반면 미영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은 미영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조총련 사회의 관습이나 문화에 세뇌되어 그것의 비합리성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채도 거부하지 못한다.


미영을 보면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반면, 미영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보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통해 주입된 생각이나 태도를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 하는 생각이 드는, 기묘하고 복잡한 장면이었다.


이 소설은 미영의 대학 4년간을 그린 성장 소설인 동시에 구로키 유라는 일본인 남성과의 연애를 그린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다. 미영은 조선대학교 근처에 있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학생인 구로키 유와 만나는데, 이는 일본인과의 교제를 금기시하는 학교 분위기와 어긋나는 일이었다. 미영은 일본에 살면서 일본인과 사귀는 걸 금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면서도, 미영이 "나는 미영이 자이니치든 조선인이든, 그런 건 신경 안 써"라고 말하는 유에 대해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인간에게, 그리고 관계에 있어 역사란, 사회란, 정치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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