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로드
조너선 프랜즌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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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을 보고 미국 현대사에 관심이 생겼다. 뒤이어 로런 그로프의 소설 <아르카디아>를 읽고 구체적으로 미국의 1970년대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알게 된 이 책의 배경이 1970년대라고 해서 바로 구입했다. 책이 도착하고 나서야 이 책이 무려 872쪽에 달하고 조너슨 프랜즌이 원래 벽돌책으로 유명한 작가라는 걸 알았는데, 하루에 100쪽씩, 총 9일 동안 읽기로 결심했으나 이틀 줄여서 일주일 만에 읽은 건 내용이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어떻게 보면 막장 가족 드라마에 가깝다. 1971년 성탄절을 앞둔 미국 중서부 시카고 교외의 한 마을. 교회의 부목사로 재직 중인 러스와 그의 아내 매리언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다. 독실하고 화목한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지만, 이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문제가 있다. 


러스는 최근 남편을 잃고 교회에 새로 가입한 프랜시스라는 젊은 여자 신도 프랜시스에게 홀딱 반한 상태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챈 매리언은 정신 상담을 받으러 다니다가 결혼 전 사귀었던 유부남과의 재회를 상상한다. 장남 클렘은 대학에서 만난 여자 친구의 영향으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심한다. 장녀 베키는 이모에게 상속 받은 거액의 유산으로 대학 진학 전 남자친구와 유럽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차남 페리는 아버지가 재직 중인 교회의 청소년부인 '크로스로드' 활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위험한 일탈을 꿈꾼다. 


이 소설은 붕괴 직전의 가정을 묘사하는 동시에 미국 문화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종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러스는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메노파 신자였는데, 메노파란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파의 일파로, 퀘이커 교도만큼이나 엄격하고 배타적인 생활을 한다고 한다. 매리언은 가톨릭 신자였는데, 남편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자가 된 후에도 천국을 믿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는 등 자기 본위의 신앙 생활을 한다. 클렘은 무신론자에 가깝고, 베키는 사귀는 남자에 따라 교회에 다니거나 말거나 한다. 


그런 이들이 종국에는 (클렘 빼고) 독실한 신자로 복귀하는데, 표면적으로는 페리의 사고가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각자가 경험한 일탈과 실패가 있고, 더 자세히는 실패로 말미암아 깨달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보다는 눈 앞의 상황을 운명이라고 믿고 신에게 의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 초반에 러스가 "가난할 때는 이런저런 일이 그냥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죠. 완전히 주님의 자비에 몸을 내맡기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이 축복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 주님과 가까워지니까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시 보니 소설의 결말을 예고한 듯하다.) 


이 소설에는 미국 가정의 붕괴와 신앙 공동체의 파멸 외에도 킹 목사 사망과 닉슨 정권의 등장, 히피 문화의 유행, 반전 시위, 페미니즘 물결 등 1970년대 초반을 수놓은 미국의 사회 문제들이 직간접적으로 언급되거나 묘사된다. 남자한테 상처를 받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식으로 반응하고 폭식으로 해소(처벌?)하는 매리언, "스무 살 때 베티 프리단과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읽었다면 내 인생 전체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죠."라고 말한 프랜시스, 다양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베키, 로라, 섀런 등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들도 여럿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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