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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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로런 그로프의 소설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로런 그로프는 <운명과 분노>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작가인데, <운명과 분노>도 그렇고 <아르카디아>도 그렇고 출간되었을 때 읽고는 별 매력을 못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 <매트릭스>를 읽고 앞으로 계속 읽어볼 만한 작가라는 판단이 들었고, <아르카디아>를 다시 읽고 판단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래서 한 번 읽고 재미없었던 책을 못 버린다...) 


내 생각에 로런 그로프는 지금은 없지만 과거에는 있었던 어떤 폐쇄된 공동체를 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 것 같다. <아르카디아>에서 1970년대 미국의 히피 대안 공동체를 재현했다면, <매트릭스>에서는 12세기 영국의 수녀원을 재현했다. <아르카디아>의 공동체와 <매트릭스>의 공동체에는 모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있지만, <아르카디아>의 지도자는 카리스마만 있고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력, 추진력이 부재해 실패한 반면, <매트릭스>의 지도자는 모든 걸 갖췄고 거의 매번 성공한다. 심지어 <아르카디아>의 지도자와 달리, 여성이다. 


그런 점에서 <매트릭스>는 한 공동체의 이야기인 동시에 한 여성 지도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 마리 드 프랑스는 왕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체구가 크고 얼굴이 예쁘지 않아서 왕족이나 귀족의 신부로 보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열일곱 살 때 잉글랜드의 가난한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당시의 여느 여자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소원이었던 마리는 수녀로 살기를 거부했지만, 얼마 안 가 체념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데 힘쓴다. (나중에 마리가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어 했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는 장면이 나온다) 


수십 년이 지나 수녀원장이 된 마리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수녀원 전체를 개혁한다. 초기에는 반발했던 수녀들도 마리가 실시한 각종 사업을 통해 식량이 늘고 금고가 차고 생활이 풍족해지자 마리를 인정하고 따르기 시작한다. 마리는 수녀원이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무력할 거라는 편견을 깨끗이 불식시킨다. 마리의 지도 하에 수녀원의 수녀들은 자력으로 엄청난 부를 쌓고, 마을에서 남자들이 쳐들어올 때에도 훌륭하게 방어한다. 


그런 마리가 끝까지 싸워야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녀들 자신의 편견이다. 마을에 재해가 발생해 성당에서 신부를 파견할 수 없게 되자 수녀원장인 마리가 직접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기로 한다. 그러자 수녀들 중 일부가 "여자가 미사를 집전하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며 거부한다. 마리는 미사를 떠나는 것보다 여자가 집전하는 미사를 받는 것을 더 큰 죄로 여기는 수녀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동정녀 마리아는 여자로 태어났으나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 중에서 가장 귀중한 보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236쪽)라고 말한다. 


로런 그로프는 12세기에 실존했던 여성 시인 마리 드 프랑스를 모델로 이 소설의 주인공 마리를 창조했다. 작가는 대학 시절에 마리 드 프랑스에 대해 알게 되어 그 후로 20년 이상 이 인물에 대해 상상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강자 중심의 역사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된 약자들의 이야기를 부활시키고 재현하는 점이 문학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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