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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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글은 솔직하다. 외동딸인 자신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부와 사회적 지위는 주지 못했던 부모에 대한 애증, 부르주아 계급을 경멸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과거에 대한 환멸,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를 사랑할수록 낮아지는 자존감과 높아지는 불안감, 우울감 등을 자신의 실제 체험을 통해 낱낱이 보여준다. 2016년에 발표한 <여자아이 기억>도 그렇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첫 성경험에 대해 들려준다. 


1958년. 열여덟 살이었던 저자는 방학을 맞아 여름방학 캠프에서 지도강사로 일하게 된다. 그 전까지 부모의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가톨릭계 여학교에 다녔던 저자로서는 몸도 마음도 해방되는 최초의 기회였다. 그동안 소설이나 잡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저자에게 거짓말처럼 이상형의 남자가 다가왔고,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캠프에서의 지위도 높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그와 밤을 보내게 된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간 저자는 남자가 전날 밤 자신과 잤다는 사실을 동료 강사들에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눈 깜짝할 새에 소문이 퍼졌고, 그 때부터 남자 강사들은 저자를 '창녀', '걸레'라고 부르고, 여자 강사들도 저자를 따돌리고 무시했다. 저자와 밤을 보낸 남자도 저자를 피했다. 그 때부터 저자에게 여름방학 캠프는 지옥이 되었다. 저자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명예 회복에 대한 미련이었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남자와 딱 하룻밤 잤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같이 잔 남자는 아무 문제 없이 생활하는데 자신만 처벌을 받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남자를 사랑한 여자가 감내해야 할 대가라면 또 다시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개학 후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보면서 '나는 너희들과 달리 성경험이 있다'고 뿌듯해 하고, 자신을 버린 그 남자의 약혼녀처럼 금발로 염색하고 초등 교사가 되려고 했다니. 내가 다 부끄럽다. 


사실 난 저자가 자신의 첫 성경험을 고백한 것보다 영국에서 오페어로 일할 때 친구와 벌인 절도 사건을 밝힌 것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첫 성경험은 저자가 피해자였지만, 절도는 저자가 가해자이고 엄연한 범죄인데 이걸 고백하다니. 심지어 저자 자신이 식료품점 딸인데 식료품점을 비롯한 여러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영화 <벌새>에도 떡집 딸인 주인공이 친구와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 있었다. 의외로 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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