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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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을 때는 작품의 소재(유부남과의 연애)에 대한 생각이 작품 전체에 대한 인상을 덮었다. 그러다 그가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고, 인터뷰나 서평 등을 통해 그에게 문학은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비(非) 남성, 비(非) 상류 계급 출신으로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기록한 일종의 증언이자 저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작품을 작품 자체의 줄거리나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 의식에만 천착해 읽는 것은 일차원적이고 표면적인 독서에 불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첫 번째 책이 <부끄러움>이다.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열두 살 때 집에서 겪은 일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도시에서 식당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는, 노동 계급 아이들은 잘 가지 않는 기독교계 사립 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인식했다고 회고한다. 학교에서 아무리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모범생처럼 행동해도, 자신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과 공유하는 특질 - 사투리를 비롯한 언어라든가, 낮은 수준의 취향 또는 취미 - 들이 끊임없이 그를 학교 아이들과 구분 지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낮,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낫을 휘두르며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 순간 평생 동안 지속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날 그가 목격한 부모의 모습에선 그가 상류층을 위한 학교에서 배우는 모범적이고 우아한 관습이나 예절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고, 그때 그는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동안 속해 있었던 세계로부터 배운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고 배반해야 하는 잔인한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서는 내가 나임을 부정해야 하는 삶이라니. 아니 에르노가 겪은 일과 정확히 똑같은 체험을 한 적은 없지만, 나에게도 나와 내 가족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인식하게 된 순간들이 있고, 그 때문에 이 책에서 그가 술회하는 과거의 기억들과 감정들이 그저 남의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식 이전과 이후의 경계가 된 사건을 특정할 수 있는 기억력과, 문제의 사건을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가치관과 사유를 다듬어간 노력과 집념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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