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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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김영하 작가의 작품들을 다시 읽고 있다. 재작년과 올해 2차에 걸쳐 출간된 김영하 소설 결정판 박스 세트를 틈날 때마다 한 권씩 읽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김영하 작가의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화자의 직업이 자살 안내자라니 신선하군'이라는 생각 외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자살 안내자인 화자가 그동안 자신이 자살을 도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두 명의 사례를 소개하는 방식을 취한다. 첫 번째 사례의 주인공은 유디트라는 여성으로, 유디트는 형제인 C, K와 삼각관계를 이뤘다가 죽음을 택한다. 두 번째 사례의 주인공은 미미라는 여성으로, 행위예술가인 미미는 비디오 아트를 하는 C와 협업을 했다가 죽음을 택한다. 두 개의 사례 모두 남자는 어리숙하고 우유부단한 반면 여자는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는 이 소설이 출간된 90년대를 강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구 한국어판 제목은 '상실의 시대')를 연상케 한다. (<에반게리온>도 비슷한 걸 보면 세기말 남성 창작자들의 공통된 성애관이었던 걸까.) 


전체적으로 지금의 김영하 작가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세기말 감성이 낭낭한 소설이지만, 다비드의 유화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시작한다든지,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가벼운 혼란을 준다든지, 종국에는 인간 존재의 허무, 기억의 불완전성, 관계의 허구성 등을 사유하는 점 등은 김영하 작가의 작품답게 우아하고 영리하며 성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 작가의 최신작 <작별인사>는 가장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철이'가 스스로 인간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역으로 가장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이야기인데, <파괴>의 75쪽에 "마네킹보다 사람은 우월한 존재일까. 왜 만화영화의 요괴들과 사이보그들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안달일까?"라는 문장이 나와서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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