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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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길이란 엄중하다는걸, 곁에서 보는 나조차도 느낄 수 있었어. 여자에게는 더욱 그래." 미우라 시온의 장편 소설 <사랑 없는 세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주인공 후지마루의 직업은 요리사다. 전문학교 졸업 후 양식당 '엔푸쿠테이'에 취업한 후지마루는 어느 날 식당 근처에 있는 도쿄대학교 대학원 식물학과 연구실로 음식을 배달하러 갔다가 연구원 모토무라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런 후지마루에게 식당 주인이자 스승인 쓰부라야가 충고한다. "여기 엔푸쿠테이에서 지금까지 수도 없을 정도로 여성 연구자의 송별회가 열렸어. 결혼이나 출산이나 남편의 전근 등으로 연구를 중단해야 했던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는 얘기야." 그러면서 덧붙인 말. "어느 세계에나 눈이 맞아 노닥거리는 놈들은 반드시 있어. 하지만 말이지, 넌 그렇게 되면 안 돼." 아무래도 사랑에 빠져 본업인 요리를 등한시하는 제자를 야단치기 위해 한 말인 듯하지만, 그래도 후지마루는 모토무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멈출 수 없어 보인다. 


결국 후지마루는 용기를 내서 모토무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모토무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식물이 연애나 결혼보다 우선이라며 거절한다. 차이고 또 차여서 '후라후라무라'라고 불리면서도(일본어로 '차이다'라는 뜻을 가진 '후라레루'의 '후라'와 후지마루의 '마루'를 합한 말) 계속해서 모토무라에게 대시하는 후지마루. 그 모습이 불쾌하거나 음흉해 보이지 않는 건, 후지마루가 자신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사랑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지마루는 모토무라가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한 사람 몫의 연구자가 될 때까지 전력으로 서포트해 주고 싶어 하고, 매일 맛있는 밥까지 만들어준다.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는 요리를 하고, 연구를 좋아하는 여자는 연구를 하고. 누구도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거나 장래를 희생하지 않고 각자의 생활을 지키면서 교제를 이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연애,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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