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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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읽은 책인데, 소설가 김연수 님이 이 책을 추천하셨다고 해서 다시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작가 루시아 벌린의 독특한 이력(세 번의 이혼, 네 아들의 싱글맘, 다양한 직업 전전)에 눈길이 갔는데, 이번에는 오롯이 문장에만 집중했다.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사진 같다. 랜드스케이프 사진이 아니라 스냅 사진. 일상의 한 귀퉁이를 그대로 도려내 박은 듯한 느낌이다.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이 그렇다. 청소부로 일하며 가정을 부양하는 여자가 있다. 한 집만 도맡아서 하는 게 아니라 여러 집을 번갈아가며 청소하는 게 그의 일이다.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청소하지만, 집주인들은 그의 청소 실력보다 그가 물건을 훔치는지 훔치지 않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집에 처음 가면 귀중품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집주인이 청소부를 의심하면 "여기에 두셨네요."라고 반박하기 위해서다. 


<섹스어필>이란 소설도 흥미로웠다. 십 대 초반인 '나'는 예쁘기로 소문난 사촌 언니 벨라와 함께 유명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언니의 목적은 백만장자의 아들이자 프로 골퍼인 리키 에버스를 유혹하는 것. 언니는 자신의 젊음과 미모로 에버스를 꼬실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지만, 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나'가 확인한 에버스의 실체는 언니의 생각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렇듯 사람들의 가식과 허영, 위선과 모순을 꼬집는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가 많다. 


지나온 삶을 회고하고 반추하는 - 그래서 에세이와 구별이 잘되지 않는 - 이야기도 많다. 마지막 소설 <회귀>가 그렇다. 바쁘게 살 때는 몰랐는데, 나이 들고 병에 걸려 하루 종일 집에 머무르며 창밖만 내다보는 생활을 하게 되고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도 많고 떠오르는 생각들도 많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같은 생각도 해보지만, 그때로선 그 선택이 최선이었고 후회해도 바꿀 수 없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때가 나에게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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