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끄럽게도,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읽은 게 이 책이 처음이다. 서점에서 책을 본 순간,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은희경 작가가 책의 홍보를 위해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과 팟캐스트에 출연했던 일이 떠올랐고, 여대 기숙사가 배경이라고 해서 궁금했는데 그때는 미처 못 읽고 다음으로 미뤘던 게 기억났다. 그 '다음'이 지금인 것 같아서 냉큼 구입해 읽었는데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은희경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소설은 2017년의 '나' 유경이 40년 전인 1977년 대학 신입생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회상의 계기는 유경의 대학 동창이자 기숙사 동기인 희진이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소설을 출간한 것이다. 희진의 소설을 읽은 유경은 자신이 기억하는 대학 시절과 희진이 기억하는 대학 시절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이 기억하는 대학 시절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는데,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들을 생각해내기도 하고, 자신이 미처 몰랐던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그때는 알지 못한, 불안과 방황, 혼란의 이유도 알게 된다. 1977년, '정숙, 노력, 순결'이 교훈인 지방의 한 여고를 졸업한 유경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여대에 진학한다.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가 컸던 유경은 이제 어른이고 대학생이니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하면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와보니 학교생활은 지루하고 기숙사 생활은 엄격하고 빡빡하다. 통금 시간을 조금만 어겨도 혼쭐이 나고, 기숙사 전체에 단 두 대뿐인 전화는 마음 편히 걸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선배와 동기들은 연애와 미팅에만 관심이 있다. 유경은 이런 현실이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무엇이, 어떻게, 왜 부당한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유경은 대학에 다니는 내내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소심한 성격과 어려서부터 있었던 말더듬증, 지방 출신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인 줄 안다. 하지만 희진의 생각은 다르다. 희진은 유경이 소심함과 말더듬증, 콤플렉스를 일종의 무기로 활용해 남자들의 관심을 끌고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유경은 40년이나 알고 지내온 '친구' 희진이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희진의 말대로 약점과 콤플렉스를 핑계 삼아 눈앞의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회피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건 아닌가 반성한다.


나아가 유경은 그 시절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던 선배, 동기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시절 여학생들은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가 누구보다 덜 예쁘다고 속상해하고, 누구보다 부잣집 딸이 아니라고 좌절했다. 이때 그들을 비교하는 건, 사실 그들 자신이 아니라 남자들이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소설의 배경인 1970년대 말 당시 유경이 나온 여대의 취업률은 26퍼센트에 불과했다. 전체 대졸자 취업률인 96.4퍼센트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남자는 대학을 나오면 거의 백 퍼센트의 확률로 취업을 하지만, 여자는 대학을 나와도 4분의 1 정도만 취업을 하는 상황에서, 여대생들이 취업보다 '취집'을 택하는 건 결코 비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의 장래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교수나 인사 담당자가 아니라 남자친구 또는 애인이었다.


유경은 대학 시절에도 이런 현실이 부당하고 불평등하다고 느꼈지만, 현실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지금도 모르는 여성이 태반이고 10년 전에 대학을 졸업한 나도 그때는 몰랐는데, 그 시절에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무력한 줄 모르고, 무능하다고만 자책했던 유경을 위로해주고 싶다. 그래도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말해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