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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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갑자기 '여성'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화장은커녕 세수도 제대로 안 한 듯한 얼굴로 다녔던 친구들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고, 화장을 하지 않은 채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김세희의 소설 <항구의 사랑>을 읽으니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발버둥 쳤던 친구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혹시 그들에게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소설의 배경은 항구의 도시 목포다. 준희는 힐러리 클린턴이 우상인, 똑소리 나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이다. 목포에서 제일 가는 여자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준희는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진학하는 게 목표다. 그런 준희의 유일한 낙은 조성모의 팬픽을 쓰는 정도다. 10대 시절 내내 조성모를 좋아한 준희는 특기인 글재주를 발휘해 팬픽 사이트에 조성모의 팬픽을 연재하고 있다. 학교에선 학생들이 팬픽을 읽는 걸 금지하지만 준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준희는 언젠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 제일 먼저 조성모를 만나러 가겠다고 다짐한다.


2학년이 된 준희는 친구의 소개로 학교 연극부에 들어간다. 학교 축제에 올릴 연극의 대본 작업에 투입된 준희는 생애 처음으로 청춘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그리고 한 선배를 알게 된다. 연극의 주연을 맡은 민선 선배다. 민선 선배의 연기를 보면서 준희는 '배우란 저런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소심한 자신과 달리 항상 활기 넘치고 씩씩한 태도가 멋있어 보이고,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외모도 점점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준희는 용기를 내 민선 선배에게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쓴다. 준희의 편지에 민선 선배가 답장을 하면서 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준희처럼 동성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껴본 적은 없지만, 내 취향이 아닌 이성보다는 내 취향인 동성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이성애자니 동성애자니 하는 구분이 어떤 면에서는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애자가 모든 이성에게 끌리는가? 동성애자가 모든 동성에게 끌리는가? 결국 특정한 성별이 아니라 끌리는 '사람'에게 끌릴 뿐이다). 준희 또한 동성애자였다가 이성애자가 되었다거나 양성애자였다기 보다는(어느 쪽이든 맞을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타입이 있고 우연히 좋아하는 타입인 사람을 자신이 다니던 여고에서 만났을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여고에서 자신이 여성임을 인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며 지냈던 준희가 대학에 입학한 후 '여성'이 되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숨겨야 했다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준희는 남자 선배들의 마음에 들고 여자 동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안 입던 치마를 사 입고, 익숙지 않은 구두를 신고, 머리를 길러야 했다. 10대 시절 내내 조성모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고, '여자답지 않게' 국제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 있다는 사실도 감춰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아왔던 친구 인희가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짧은 머리에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준희의 대학으로 찾아왔을 때는 행여 같은 과 사람들이 인희를 볼까 봐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준희가 인희가 얼마나 다를까. 준희는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 인희가 남자처럼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역할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여서 부담스러웠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 그렇게 옷을 입고 행동하는 게 못마땅하고 창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준희 역시 대학에 들어간 후 '여자처럼' 옷을 입고 '여자처럼' 행동했다. 이것은 왜 부담스럽고 창피한 '역할 놀이'가 아니란 말인가. 소설 속에서 준희는 묻는다. "가상의 기대와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 살게 될까". "언제부터 남자가 이렇게 중요했지". "그때 그녀가 말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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