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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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버튼의 전작 <미니어처리스트>가 좋았기에 차기작인 <뮤즈>도 주저하지 않고 읽었다. <미니어처리스트>와 마찬가지로 낯선 곳에서 생활하게 된 여성 주인공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심쩍은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여성, 여성 예술가, 유색 인종 문제에 대한 인식은 전작보다 훨씬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야기는 1967년 영국 런던과 1936년 에스파냐 말라가를 오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967년 영국 런던. 영국의 식민지였던 트리니나드 토바고 출신의 20대 여성 오델 바스티엔은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영문학 학위를 받고 작가가 되기를 꿈꾸며 런던으로 왔지만,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친구가 소개해준 구두점에서 일하며 하루 하루를 근근이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델은 '설마 되겠어?"라는 생각으로 이력서를 보내본 런던 스켈턴 미술관으로부터 타이피스트로 채용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새 직장에 만족한 오델은 얼마 후 친구의 결혼식 파티에서 로리 스콧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오델이 미술관에서 일한다고 하자 로리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유품 중에 그림 한 점이 있다며 그걸 봐달라고 부탁한다.


1936년 에스파냐 말라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술품 거래상 해럴드 슐로스는 아내 세라와 외동딸 올리브를 데리고 말라가에 정착한다. 올리브는 얼마 전 부모 몰래 유명 미술 학교에 자신의 그림을 보내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여자는 좋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버지 앞에서 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슐로스 가족의 집으로 이삭과 테레사가 찾아온다. 남매인 이삭과 테레사는 슐로스 가족의 허드렛일을 해주겠다고 하고 슐로스 가족은 이를 받아들인다. 올리브는 이 남매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둘에게 홀딱 반해버린다. 연상인 이삭에게는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나이가 비슷한 테레사에게는 친구로서의 우정을 기대한다. 이삭을 볼 때마다 영감이 떠오른 올리브는 그걸 그림으로 그린다. 어느 날 올리브는 자신의 그림을 테레사에게 보여주고, 테레사는 이 그림을 세상에 발표하자고 하지만 올리브는 거절한다. 여자는 좋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던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이루는 두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델과 올리브는 여러 면에서 닮았다. 둘 다 이방인이고,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 사랑을 쉽게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 여자로부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지원을 받지만 그 또한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으면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델은 자신에게 작가가 될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 투고조차 하지 않고, 올리브는 미술 학교에 등록조차 안 한다. 남들이 그들의 작품을 보고 칭찬해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델과 올리브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나는 못 해', '나는 할 수 없어'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포기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그리고 오델과 올리브로 하여금 '나는 못 해',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게 만든 주변 사람들의 말 - '여자는 좋은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 - 을 생각하니 더욱 답답했다.


어디 예술가뿐인가. 여자는 정치인이 될 수 없고, 법조인이 될 수 없고, 의사가 될 수 없고, 체육인이 될 수 없고... 등등의 수많은 편견이 역사상 존재했고 지금도 남아있다. 여성들은 그러한 말들을 이겨내왔고, 지금도 이겨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올리브의 뮤즈인 이삭이 올리브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롤하는 대목이다. 올리브는 자신이 이삭을 너무 사랑해서 이삭에게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지만, 이삭은 올리브가 자신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게 불편하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타인이 멋대로 그린 내 그림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평가되는 일이 마뜩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에게 행해졌다. 수많은 남성 화가들이 여성을 뮤즈로 삼아 작품을 완성하고 그것들을 공개해 돈을 벌고 명예를 얻었다(이 중에는 여성의 누드를 소재로 한 작품도 적지 않다). 그 작품들의 뮤즈였던 여성들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 적나라한 모습이 노출되고, 입방아에 오르고, 부정확한 평판을 얻었지만,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졌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아내나 애인, 여자 형제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 소개해 명성을 얻은 예술가들도 많다고 한다.


소설 자체만 보면 1967년 영국 런던의 이야기와 1936년 에스파냐 말라가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미스터리한 사건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는 방식의 스릴러 소설인데, 구석구석을 잘 살펴보면 스릴 이상으로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곳곳에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은 왜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는가. 여성은 왜 욕망의 주체가 될 수는 없는가. 남성은 원래 이렇고 여성은 원래 이렇다는 생각은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재생산하고 있는가. 소설로서의 재미는 물론이고 의미도 적지 않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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