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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의 섬 ㅣ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평점 :

일본 추리소설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하지만 마츠모토 세이초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사회파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읽어서 정통파로 분류되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게 읽었다. 명성에 비해 과히 적은 작품만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 고려대학교와 출판사 이상이 손잡고 에도가와 란포를 비롯한 일본 추리소설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를 출간했다는 걸 알고 반가웠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중에서도 에도가와 란포의 초기 명작인 <심리시험>. <지붕 속 산책자>, <도플갱어의 섬>, 그리고 만화, 영화, 드라마 등으로 여러 번 리메이크된 장편 소설 <검은 도마뱀>이 한 권에 수록된 이 책을 읽은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심리시험>은 1923년에 작가로 데뷔한 에도가와 란포가 1925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가 청년기에 큰 영향을 받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도쿄 소재의 대학에 다니는 후키야 세이이치로는 하숙집 할머니가 안방 도코노마에 거액의 돈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고 완전 범죄를 계획한다. 마침내 할머니를 살해하고 할머니가 숨기고 있던 돈을 훔친 후키야는 경찰이 자신의 동급생인 사이토 이사무를 강력한 용의자로 의심하는 걸 알고 짐짓 안심한다. 이때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가 나타나 경찰에게 후키야와 사이토를 상대로 '심리시험'을 해보라고 제안하고 후키야는 이에 응한다.
후키야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연습'만 제대로 하면 완벽하게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후키야의 예상과 달리 후키야가 연기한 '완벽함'이 후키야 자신의 뒤통수를 친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이 범인 찾기에 골몰하는 것과 달리 이 소설은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밝힐 뿐 아니라 범인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완전 범죄를 꿈꾸며 빠짐 없이 계획을 세운 범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꾀에 넘어가는 모습이 통쾌했다. 범인이 현장에 남긴 증거나 물리적인 정황을 이용해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범인의 심리를 이용해 범인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200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해 인기를 끈 심리 스릴러 장르의 효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붕 속 산책자>는 <심리시험>과 같은 해에 발표된 단편 소설이다. 학교도 직장도 안 다니는 고다 사부로는 여러 하숙집을 전전하다 도쿄에 새로 지어진 하숙집인 '도에이칸'에 정착한다. 기이한 걸 좋아하는 고다는 새 하숙집이라서 아직 깨끗한 벽장 안에서 잠을 자거나 공상을 하다가 문득 천장 판자를 밀어본다. 그러자 판자가 위로 쑥 밀렸고, 밀린 판자 위의 공간, 즉 천장 위와 지붕 아래 사이의 공간이 나타났다. 고다는 그 후로 틈만 나면 천장 위로 올라가서 '지붕 속 산책'을 즐기며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를 걸어다니는 기분을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다는 그의 방과 맞은편에 있는 건물의 한쪽 구석 천장에 희미한 틈새가 있는 걸 발견한다. 틈새 사이로 보인 사람은 우연히도 고다가 도에이칸의 하숙인들 중에서 가장 미워하는 엔도였다.
설마 천장에 난 틈 사이로 누가 날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엔도는 세상 모르는 표정으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고다는 자신이 숨기고 있는 비밀과 엔도가 지닌 어떤 물건을 결합하면 완전범죄를 꾸밀 수 있다는 걸 떠올리고 이를 실행한다. 고다의 범죄를 간파한 사람은 에도가와 란포의 페르소나인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다. 아케치는 의심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고다가 보인 사소한 행동만을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이는 영국의 추리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의 대표작 '셜록 홈스' 시리즈의 주인공 셜록 홈스의 추리 기법을 연상케 한다. 건물의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부 구조를 이용해 살인 계획을 세우고 완전 범죄를 꿈꾼다는 점에서 2017년에 읽은 에도가와 란포의 <유령탑>이 떠오르기도 했다.
<도플갱어의 섬>은 이 책의 표제작이자 에도가와 란포가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연재한 장편 소설이다. 삼류 작가 히토미 히로스케의 꿈은 광대한 토지를 매입하고 수백 수천 명을 동원해 지상 최대의 낙원, 꿈의 나라,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한데, 현실은 명색이 작가인데 싸구려 번역 하청이나 옛날이야기, 성인 소설 같은 것을 써서 그날 그날의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히토미는 자신과 꼭 닮은 M현 제일의 부호 고모다 겐자부로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고모다 겐자부로가 소유한 섬 '오키노시마'가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들기에 최적의 땅이라고 생각한 히토미는 M현의 고모다 지방에는 시체를 화장하는 풍습이 없다는 걸 이용해 미증유의 계획을 세운다. 고모다 겐자부로의 묘를 파서 (고모다 겐자부로의) 시체를 없애고 자신이 살아돌아온 고모다인 척하는 것이다.
계획을 이루기 위해 히토미는 우선 자신은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고, 바다를 헤엄쳐 M현까지 가서 고모다 겐자부로의 묘를 찾아가 시체를 파내는 데까지 성공한다. 썩어가는 시체에서 옷을 벗겨내 그걸 자기 몸에 걸치고 고모다인 척하는 히토미. 결국 히토미는 자신이 고모다인 걸로 사람들을 속이는 데 성공하는데, 단 한 사람만은 히토미에게 속지 않고 히토미를 의심한다. 마음은 안타깝지만 원래의 자신을 없애면서까지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난 히토미는 끝내 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꿈꿔온 이상향을 완성하는 데 집중한다. 완벽한 유토피아를 만들려다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지만 이 소설은 무려 90여 년 전에 쓰였다. 그 시절에 이미 인간의 한계와 완벽주의의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을 썼다는 점이 놀랍다.
<검은 도마뱀>은 에도가와 란포가 1934년에 연재한 장편 추리소설이다. 에도가와 란포의 페르소나인 아케치 고고로가 신출귀몰한 여도둑 검은 도마뱀(미도리카와 부인)과 대결을 벌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도쿄 G가(街)의 댄스홀. 뛰어난 미모와 화려한 춤솜씨, 매끄러운 쇼맨십을 자랑하는 댄스홀의 여왕 검은 도마뱀은 친하게 지내는 청년 아마미야 준이치의 부탁으로 그가 죽인 시체를 처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 최고의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와 여러 번에 걸친 두뇌 대결을 벌이게 된다. 이중에 가장 인상적인 대결은 오사카의 거물 보석상 이와세 상회의 주인 이와세 쇼베와 그의 딸 사나에를 둘러싼 대결이다.
미도리카와 부인의 꿈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모두 모으는 것. 미도리카와 부인은 이와세 쇼베가 가지고 있는 일본 최고의 다이아몬드와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의 딸 사나에를 손에 넣기 위해 일부러 그들의 뒤를 밟아 그들과 같은 호텔에 투숙하는 데까지 성공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걱정한 이와세 쇼베가 일본 최고의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고용하는 바람에 계획을 이루기가 쉽지 않게 된다. 아케치 고고로와 미도라카와 부인은 변장과 인형이라는 동일한 트릭으로 서로 속고 속이는데, 이 과정에서 탐정과 범인 사이의 긴장감을 넘어선 남자와 여자 사이의 긴장감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반인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두뇌와 지략의 소유자인 두 남녀가 서로를 수렁에 빠뜨리고 또 그 수렁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책은 추리소설 독자로서도 재미있었지만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열렬한 팬으로서도 즐겁게 읽었다.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 '에도가와 코난'은 에도가와 란포의 '에도가와'와 영국의 추리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의 '코난'을 합쳐서 만든 이름이다(참고로 에도가와 란포는 미국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드가 앨런 포'를 일본식으로 바꿔서 만든 이름이다). 코난을 대신해 사건을 해결하는(?) 일본 최고의 명탐정 '모리 고고로'는 아케치 고고로를 변형해 만든 인물로 보인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동일 인물로 착각할 만큼 비슷한 외모를 이용해 주변 사람들을 속인다는 설정이나(쿠도 신이치와 쿠로바 카이토), 변장이나 인형 등을 활용해 도둑질을 한다는 설정(괴도 키드) 모두 <명탐정 코난>의 팬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마침 오늘 개봉한 <명탐정 코난> 극장판 새 시리즈 <명탐정 코난 : 감청의 권>을 보고 왔는데, 괴도 키드에게 납치된 코난이 엉겁결에 지은 가명이 '아서 히라이'였다. '아서'는 '아서 코난 도일'에서 따왔고 '히라이'는 에도가와 란포의 본명인 '히라이 타로'에서 따왔다고 영화 후반에 나온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에도가와 란포의 본명이 '아서 히라이'인 걸 몰랐다면 코난이 갑자기 왜 자신의 가명을 '아서 히라이'라고 지었는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을 애정하는 독자이자 <명탐정 코난>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팬으로서 앞으로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꼼꼼히 읽어나갈 생각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