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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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레즈비언들은 어디서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영상의 화자는 육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백발의 여성 노인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새까만 머리의 20대였을 그는, 당시 레즈비언들이 서울 명동의 유네스코 회관 뒤편 골목에 주로 모였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없어진 맞춤집 골목에서 남자 정장을 맞춰 입고, 샤넬 다방과 PJ 레스토랑에서 레즈비언들을 만났다고 했다. 70년대면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시절이다. '평범한' 젊은이들도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당했던 때다. 그도 경찰 단속에 걸려 유치장에 끌려간 적이 있다. 여자라고 항변하니 여자가 왜 남자같은 차림을 하고 다니느냐며 구타했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일들이지만, 그때는 앞으로 어떻게 이 나라에서 계속 살지 막막했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세라 워터스의 소설 <나이트 워치>에 나오는 1940년대 영국 런던의 레즈비언들의 모습은 1970년대 대한민국 서울의 레즈비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1947년 런던. 온 국민이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 성장에 몰두하던 그 시절. 직업도 없고 가정도 없이 레너드라는 의사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케이는 오랜만에 친구 미키를 만나러 밖으로 나간다. 짧은 갈색 머리와 바지 차림을 고수하는 케이는 사람들로부터 "아직도 전쟁중인 줄 아시나?"같은 핀잔을 종종 듣지만, 바지 입은 여자가 공공의 적쯤으로 취급 당했던 전쟁 전에 비하면 사정이 낫다. 전쟁을 경계로 여성들의 복장이 매우 자유로워졌다. 남성들이 전쟁에 동원되면서 남은 일자리에 여성들이 고용되었고, 나풀나풀한 레이스가 달려 있는 드레스 차림으로는 일하기가 불편해 바지 차림을 선호하게 되었다. 덕분에 케이와 미키 같은 레즈비언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짧은 머리와 바지 차림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은 케이와 미키에게 직업도 선사했다. 전쟁 전이었다면 꼼짝 없이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라는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케이와 미키는 전시에 야간 구급대원으로 일했다. 한밤중에 병원 응급실에 대기하고 있다가 신고가 들어오면 서둘러 출동해 사람을 구조하고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었다. 평시였다면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하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남성에게만 기회가 돌아갔을 것이다. 전시라서 여성인 케이와 미키에게도 기회가 돌아갔고 보란듯이 해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일자리는 전쟁터에서 복귀한 남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직업을 잃은 케이와 미키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귀족 계급 출신인 케이는 병원 이층의 작은 방으로. 노동자 계급 출신인 미키는 자동차 정비소로. 미키는 정비소에서 남자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손님들은 미키에게 얼마 안 되는 팁을 주면서 립스틱이나 사라고 훈계한다. 여자의 입술색이나 신경 쓰는 그들은 니커보커 차림으로 땀 흘리며 일하는 미키의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꿈에도 모른다.  


전쟁의 파고는 넘었으나 자기 삶의 파고는 넘지 못한 레즈비언과 다른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이어진다. 헬렌과 비브는 전시에 해외에서 복무하느라 혼기를 놓쳤거나 아내와 소원해진 남성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여성을 찾아 연결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쉬는 시간이 되면 헬렌과 비브는 온갖 잡담을 나누지만, 정작 각자에게 가장 내밀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헬렌은 사실 촉망받는 추리소설 작가인 줄리아와 동거 중인 레즈비언이다. 비브는 전쟁 중에 만난 유부남 레지와 오랫동안 불륜 관계다. 헬렌은 줄리아가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훨씬 멋진 여자와 눈이 맞아 당장이라도 이별을 고할까봐 불안하다. 비브는 헬렌과 줄리아가 그저 사이 좋은 친구인 줄로만 안다. 비브 자신이 불륜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동생 덩컨이 동성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감옥 신세를 진 일이 있어서 감히 동성애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요즘 몹시 바쁘거든. 매일 외출 스케줄이 빡빡해." "이상한 데나 쏘다니겠지." "영화 보러 다녀." 케이가 대답했다. "극장에 가는 게 뭐가 이상해. 한자리에 앉아 두 번 내리 볼 때도 있어. 영화 중간쯤에 들어가 후반부를 먼저 볼 때도 있고. 뒤를 먼저 보는 편이 더 좋더라. 보통 사람들의 미래보다는 과거가 더 흥미진진하잖아. 뭐, 나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 (145-6쪽)


사람들의 미래보다는 과거가 더 흥미진진하다는 케이의 말처럼, 이 소설도 1947년, 1944년, 1941년 순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흥미롭다. 1947년의 이야기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케이와 헬렌, 비브의 접점은 1944년과 1941년의 이야기에 이르러 비로소 드러난다. 1944년 당시 케이와 헬렌은 완벽한 연인이었다. 야간 구급대원인 케이는 언제 어디서 공습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천사처럼 예쁜 헬렌을 혼자 두고 매일밤 출근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헬렌은 헬렌대로 밤마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며 일하는 케이가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헬렌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시청의 피해지원부서에서 일하는 헬렌은,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을 조사하는 일을 하는 한편 공습 사이사이에 글을 쓰는 줄리아에게 점점 마음을 빼앗긴다. 이 때도 레지와 사귀었던 비브는 매달 찾아오는 '친구'가 오지 않아 마음이 불안하다. 비브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힘들게 병원을 찾은 비브는 불법 시술을 받다가 위독한 상황에 이른다. 유부남인 데다가 군인 신분인 레지는 비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결국 비브는 여성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벨벳 애무하기>, <끌림>, <핑거 스미스>로 '빅토리아시대 3부작'을 완성한 세라 워터스는 작품 배경이 한정적이라는 고민 끝에 <나이트 워치>에서 처음으로 빅토리아 시대가 아닌 1940년대를 배경으로 택했다고 한다. 달라진 것은 시대 배경만이 아니다. <나이트 워치>는 전작인 <핑거 스미스>와 달리 레즈비언 서사만 다루지 않는다. 전쟁 중 병역을 거부해 복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동성애를 이유로 복역한, 비브의 남동생 덩컨과 그의 감옥 동기 프레이저의 이야기다.


1947년 덩컨은 재직 중인 공장에서 우연히 프레이저를 만난다. 출소 후 기자가 된 프레이저는 덩컨이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덩컨이 현재 '호러스 삼촌'이라는 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크게 놀란다. 덩컨과 프레이저가 감옥에 있을 때 간수였던 먼디 씨의 성이 호러스라는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다. 복역 당시 프레이저는 덩컨과 먼디 씨가 평범한 죄수와 간수 사이가 아니라고 의심했을 뿐 아니라 덩컨의 성적 경향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덩컨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추궁하는 프레이저가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레이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친밀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다.  프레이저가 덩컨의 누나인 비브의 근황을 물었을 때는 왠지 모를 질투심마저 느낀다.


"나도…… 나도 세상이 달랐으면 좋겠어. 왜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 걸까? 이렇게 몰래 다니는 것도 신물나고…… (중략) 구질구질하게 살금살금 다니는 것도 싫어. 우리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아니 그 비슷한 거라도." 케이는 눈을 껌벅거리다 시선을 피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 인생의 비극이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헬렌을 아내로 맞이하거나 아이를 안겨줄 수 없다…… (428쪽)


"나는 네가 한 일이 용감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야." 프레이저는 코를 훔쳤다. "아무것도 안 하는, 참 쉬운 용기지. 너는 나보다 더 용감한 남자야, 피어스." (575쪽)


<핑거 스미스>가 빅토리아시대를 고증하고 당시의 레즈비언 서사를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나이트 워치>는 시대보다도 서사와 그 의미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소설가가 되기 전 레즈비언과 게이 역사소설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세라 워터스의 학자적 면모가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학자라면 특정 시대를 고증하고 그 시대의 서사를 재현하는 데에만 집중해도 문제되지 않지만, 작가라면 작품을 통해 시대를 대변하고 독자들과 소통할 책임이 있다. <나이트 워치>는 그런 면에서 훌륭한 미덕을 갖춘 작품이다. 세라 워터스는 <나이트 워치>를 통해 레즈비언과 게이로 대표되는 소수자들의 잊힌 혹은 지워진 역사를 불러내고, 이들이 사회로부터 어떤 배제와 차별을 당했으며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살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여전히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소수자들에게, 그들에게도 역사가 있으며 새로운 역사를 쓸 자격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내가 '70년대 레즈비언들은 어디서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보고 비로소 그 시절의 레즈비언들의 삶을 알게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이트 워치>를 읽고 미처 알지 못했거나 부러 무시했던 레즈비언, 게이 등 소수자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성애자 일색인 것처럼 보이는 거리에 레즈비언도 있고 게이도 있고 양성애자도 있고 트랜스젠더도 '있었다'는 것을, 바로 지금도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성애자 남성만이 승자 또는 패자로 기록된 역사뿐만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의 피와 땀, 눈물이 밴 또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누구라도 역사에서 배제된 역사, 구전으로도 전해지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그렇게 공백이거나 투명한 채로 남아있는 역사의 부분들을 다양한 색으로 채우다 보면 우리 모두의 역사가 더욱 다채로워지고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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