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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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거지 소녀>라서 주인공이 거지 소녀인 줄 알았다. 그래서 주인공 로즈에게 부모도 있고 집도 있어서 언제쯤 거지가 될까 궁금해하면서 읽었다. 끝내 거지가 되지 않은 채 대학에 진학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런 문장을 만났다.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즈의 첫사랑, 로즈의 전 남편 패트릭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패트릭이 그런 말을 한 의도를 모르지 않는 건 아니다. 부잣집 아들인 패트릭의 눈에는 가난한 집에서 힘들게 자란 로즈가 동화 속 거지 소녀와 겹쳐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거지라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패트릭으로 하여금 로즈에게 거지 소녀라고 말할 수 있게 한 건 무엇일까. 그가 부자여서일까, 아니면 남자여서일까, 그것들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더라도, 그가 만약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여자였다면, 부잣집 아들에게 그런 말을 '감히' 함부로 할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은 본격적인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소설 곳곳에 여자라면, 그것도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장면과 문장이 나온다. 학창 시절 로즈의 학교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여학생이 코트 보관실 바닥에 떨어뜨린 생리대를 누군가가 학교 중앙홀에 있는 트로피 케이스에 몰래 넣어두었다. 문제가 되자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남학생들은 낄낄거리며 여학생들을 조롱했다. 결국 한 여학생이 생리대의 주인으로 지목되자(그 생리대를 트로피 케이스에 넣어둔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은 듯하다) 남학생들은 이렇게 놀렸다. "오늘도 걸레 차고 있냐, 뮤리얼?" 여학생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 같으면 자살하고 만다." 측은함이 아니라 조급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로즈가 딸 애나를 낳은 산부인과 병원에서 알게 된 조슬린과 클리퍼드는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로즈는 현재 전업주부인 조슬린인 결혼 전까지 작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꿈을 포기한 이유를 물어본다. 그러자 조슬린은 이렇게 말한다. "(클리퍼드가 가진) 진짜 재능이 어떤 건지 보니까 난 그냥 펜이나 놀리며 노닥거리다 말 거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그냥 그 사람을 돌보는 게, 그러니까 내가 그이를 위해 하는 이딴 일들이 다 뭐든 간에 좌우간 이걸 하는 게 낫겠더라고." 그러고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여자들은 대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잖아. 남자들처럼 그렇게는 말이야." 조슬린은 그때까지 로즈가 만난 여자들 중에 가장 똑똑하고 개방적이며 재미있는 사람이었는데도 이런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로즈는 조슬린이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고, 조슬린 또한 그걸 알았다.


로즈의 삶에는 매질을 일삼았던 아버지와 배 아파 낳은 자식과 그렇지 않은 자식을 은밀하게 - 때로는 공공연히 - 차별했던 새어머니, 한때는 달콤한 연인이었지만 결국 가식적이고 비겁한 속내를 드러낸 패트릭, 한 시절 매우 친하게 지냈으나 이제는 소원해진 조슬린과 클리퍼드 부부 외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 랠프도 있다. 랠프와는 이름이 알파벳 순서상 비슷해서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았다. 집안 환경이 비슷하고 유머 감각도 통해서 동지애 비슷한 감각으로 친하게 지냈다. 랠프가 집안 사정상 학교를 그만둔 후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겼는데, 한참 후 로즈는 랠프가 해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로즈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아는 소년들은 아무리 무능해 보여도 결국은 남자가 될 것이며, 자신들이 갖춘 것보다 훨씬 큰 재능과 권위가 필요할 것 같은 일들을 하도록 허가받을 거라는 사실을."


세월이 흐른 후 로즈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다. 로즈를 가혹하게 매질했던 아버지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새어머니 플로는 양로원에 들어갔다. 배다른 동생 브라이언은 로즈처럼 진작에 고향을 떠나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었고, 동창들은 장의사가 되거나, 회계사가 되거나,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로즈는 랠프와 아주 잠깐 만난 적이 있다. 길게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동안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이렇게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에 은근한 기쁨과 감동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로즈는 여전히 흉내 내기를 잘하는 랠프를 보면서 자신이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 랠프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비슷했지만 남자라서 수많은 기회를 부여받았던 랠프와, 남자가 아니라서 스스로 기회를 찾아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로즈는 살면서 자신에 대해 이렇다 또는 저렇다고 규정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새엄마 플로는 로즈에게 건방지고 이기적인 여자애라고 욕했고, 헨쇼 박사는 로즈에 대해 유흥에는 관심 없는 학구파라고 말했다. 조슬린은 로즈가 제법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놀란 표정을 차마 감추지 못했고, 패트릭은 로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로즈가 마구간 같은 집에서 자란 거지 소녀라고 말했다. 그 말들은 모두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로즈 자신의 선택이다. 로즈는 새엄마가 건방지고 이기적이라고 욕하든 말든 고향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았다. 헨쇼 박사의 말을 듣지 않고 패트릭과 결혼했다. 예술가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조슬린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끝내 자신을 오랫동안 무시하고 능멸했던 남편 패트릭과 헤어졌다.


로즈의 삶에는 분명 불행의 씨앗이 많이 있었다. 생모는 일찍 사망했고, 계모는 사려 깊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무심했다. 집안은 가난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계모와 로즈가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했으나 일찍 결혼을 하는 바람에 직업을 가지지 못했고, 이혼 후 직업을 가지려 했을 때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즈가 나름 만족할 만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남의 생각에 의지하는 대신 스스로 판단하고 결과에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로즈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마땅한 인간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고, 스스로 그것을 증명할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원제가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Who Do You Think You Are?)>라는 사실을 알았다. 영미권에서 이 말은 상대의 오만함을 지적하며 욕보이고 싶을 때 쓴다고 한다. 로즈는 주로 새엄마에게 야단을 맞을 때 이 말을 들었다. 새엄마의 눈에는 똑똑하고 당찬 로즈의 모습이 오만하고 건방지게 보였던 모양이다. 당시만 해도 어리고 약했던 로즈는 미처 자신을 변호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새엄마 앞에서 로즈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정체를 알린다. 새엄마 말대로 자신이 오만하고 건방진 계집애인지, 아니면 제법 괜찮은 대학을 나오고 어엿한 직업도 있는 똑똑하고 당당한 여성인지를 새엄마가 보게 한다. 물론 새엄마는 성장한 로즈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다. 친자식이 아닌 로즈의 성공보다, 친자식인 브라이언의 성공을 더 크게 여긴다. 그래도 상관없다. 로즈의 삶은 온전히 로즈의 것이고, 로즈가 누구인지는 로즈 자신이 이미 결정했다.


패트릭도 끝내 바뀌지 않는다. 이혼한 지 몇 년이 지난 후 로즈와 패트릭은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로즈를 알아본 패트릭은 얼굴을 찌푸린다. 패트릭에게 로즈는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배신한 여자, 비정하게 딸을 버리고 떠난 여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패트릭이 아는 로즈는 로즈의 일부일지언정 전부가 아니다. 패트릭이 아는 로즈로 살기에 로즈는 너무 크고 대단한 존재다.


한때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입으로 동시에 자신을 거지 소녀라고 모욕했던 남자. 그 남자로부터 등을 돌리며 로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더는 누구도 나에게 거지 소녀라는 말을 못 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내 생각에 로즈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로즈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라고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로즈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 중 누구도 타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규정할 자격이 없듯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이다. 삶으로 보여줄 뿐이다. 나는 거지 소녀가 아니라고. 나는 나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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