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낙태 여행 - Journey for Life
우유니게.이두루.이민경 외 지음 / 봄알람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펴낸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의 네 구성원 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이 유럽의 다섯 나라 - 프랑스, 네덜란드, 아일랜드, 루마니아, 폴란드- 를 방문해 낙태 합법화 운동가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제목만 덜렁 적혀 있는 표지는 다소 오싹하지만, 안에는 유익한 데다가 재미있기까지 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 


이 책은 여행기 형식이라서 술술 읽힌다. 여름휴가의 마지막 날, 겨울에는 어디로 갈지를 두고 신나게 수다를 떨던 봄알람 식구들은 엉겁결에 유럽에 가서 여러 나라의 낙태권 활동가들을 만나러 가기로 한다. 숙소도 정하지 않고 유심칩도 없이 항공권과 짐가방만 들고 공항으로 향한 이들은 '될 대로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출국길에 오른다. 그렇게 도착한 유럽에서 이들은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는다. 프랑스, 네덜란드, 아일랜드, 루마니아, 폴란드에서 활동 중인 낙태 합법화 운동가들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도와주려고 한다. ​ 


그들이 알려준 내용 중에는 충격적인 것이 아주 많았다. 우선 페미니즘 선진국인 줄 알았던 프랑스는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페미니즘 선진국이 아니었다. 프랑스가 1970년대 대규모 투쟁으로 낙태 합법화를 성취한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에는 우익 보수 정권이 기승을 부리면서 여성들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더욱 제약받는 실정이다. 페미니스트는 사회 구성원의 10퍼센트도 될까 말까 하며, 여전히 거의 모든 면에서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이다. ​ 


세계적인 '재생산권 선진국'으로 알려진 네덜란드 역시 실정은 다르지 않다. 종교(가톨릭)의 영향이 지배적인 프랑스에선 낙태 금지법을 '여성의 쾌락과 행복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의 소산으로 보는 반면, 그렇지 않은 네덜란드에선 국가와 '남성의 재산인 아이의 처분을 여성이 결정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는 의지'의 소산으로 본다. 어떤 해석이든 간에 낙태 금지법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을 남성이 가지겠다는 의도를 지닌, 남성 중심 사회의 산물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 


아일랜드 여행 중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아일랜드를 찾은 봄알람 식구들은 더블린의 중심부인 윌리엄 스트리트 사우스에서 낙태권과 국민투표에 관한 홍보물을 나눠주는 이벤트에 참여했다. 용기를 내 홍보물을 나눠주고 있는데, 머리가 희끗한 중장년의 여성이 다가와 무얼 하냐고 물었다. 이벤트의 취지를 알려주자 그 여성은 '자신은 어머니가 없이 고아원에서 수녀의 손에 자랐고', '아이는 소중하기에 죽여서는 안 된다. 낙태가 가능했다면 자신이 낙태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견 일리 있는 말이지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낙태가 합법화되었다면 그 여자의 어머니는 원치 않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여자는 자신을 간절히 원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고아원이 아닌 단란한 가정에서 자랐을 것이다. ​ 


낙태권은 원치 않는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인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생명이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서 낳아지고 길러지지 않을 권리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는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첫째 아이(나)와 둘째 아이 모두 딸이었고, 셋째 아이 역시 딸이라고 해서 지웠다. 부모님은 나와 내 동생을 부족함 없이 키워주셨지만, 이따금 우리가 아들이길 원했다는 말을 하고 지금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차라리 딸인 내가 태어나지 않고 아들인 다른 자식이 태어나 우리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산 우리 부모님의 삶이 '아들도 못 낳은 실패한 삶'으로 규정되는 게 지긋지긋하게 싫다. ​ 


이 책에 실린 의료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하루 약 3000명의 여성이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다. 현재 한국에서 낙태는 불법이기 때문에 이 여성들을 위험한 수술을 받으면서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신체적, 정신적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가임기 여성의 21퍼센트, 즉 5명 중 1명이 임신 중절 수술을 경험한다는 통계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문란한 미혼 여성이 방종하게 살다가 낙태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기혼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후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서 낙태를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