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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리커버 특별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와 나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 나이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가 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는 내내 깊이 공감했다. 저자가 들려주는, 저자가 직접 겪은 이야기들은 내가 그동안 겪었고 겪고 있는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자는 어릴 적 친한 친구에게 "너 꼭 페미니스트 같아"라는 말을 듣고 그 단어의 뜻은 몰랐지만 칭찬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나도 그랬다. 학교에서 반장으로 뽑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로부터 "여자애는 반장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듣고 포기해야 했다. 나도 그랬다. 맨살이 보이지 않는 긴 바지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오므리렴", "몸을 가리렴" 같은 말을 들었다. 나도 그랬다. '남자같이' 옷을 입고 '남자같이' 행동하면 여자답지 못하다고 혼나고, '여자같이' 옷을 입고 '여자같이' 행동하면 여자라고 무시당하고 차별당했다. 나도 그랬다. 여자는 남자보다 공부를 잘하면 안 되고, 좋은 대학을 나오면 안 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져선 안 되고, 돈을 더 벌면 안 된다고 배웠다. 여자는 남자보다 키가 커도 안 되고, 힘이 세도 안 되고, 근육이 더 많아도 안 된다고 배웠다. 나도 그랬다.
저자는 나이지리아 출신이고 나는 한국 출신인데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을까. 답은 하나다. 우리가 하필이면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차별하고 혐오해도 아무 죄가 되지 않는 남자가 아니라, 차별받고 혐오당해도 끽 소리조차 내면 안 되는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남자가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어야 하는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여자는 절대 그런 존재가 아니며, 더는 그런 존재여선 안 된다). 명문대를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 형편이 달라질까. 요즘 읽고 있는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에 따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미셸은 남편과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하버드 로스쿨), 남편과 똑같이 변호사 출신이고, 남편만큼 열심히 일하고 좋은 직업을 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그저 '미세스 오바마'로 본다고 한탄한다. 이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헌신과는 별개의 문제다. 오바마도 미셸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아끼지만 '미스터 로빈슨'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나의 감상과 달리) 이 책은 결코 격하지 않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저자의 경험과 생각을 조근조근 들려줄 따름이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용기와 열정은 용암만큼 뜨겁고 폭풍처럼 거대하다. 저자는 자신이 던진 조약돌이 전 세계에 걸쳐 큰 파문을 일으키길 바란다. 모든 여성과 남성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하고 함께 조약돌을 던지길 원한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편견과 달리, 페미니즘은 오로지 여성의 권리 신장만을 요구하는 사상이 아니다.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당하고 차별받은 경험이 있다면,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개성을 말살당하고 원치 않는 의무와 부담을 져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다.
어떤 사전에선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한다고 한다. '여자가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 여자가 인간이라고 믿는가? 여자가 인간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