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두려운 사랑 - 연애 불능 시대, 더 나은 사랑을 위한 젠더와 섹슈얼리티 공부
김신현경 지음, 줌마네 기획 / 반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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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동안 좋은 책을 많이 만났지만 이 책만큼 좋은 책을 만나지는 못했다. 내 깜냥으로는 감히 평가할 수도 없고 마땅한 찬사의 말을 찾을 수도 없어서 여러 번 글을 썼다가 지웠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시청하면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을 보면서,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을 들으면서 즐기면서도 어딘가 불쾌하고 불편했던 이유에 대해 이 책만큼 속 시원한 해설을 만나지 못했다. 그것들이 왜 불쾌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라는 차원으로 설명하는 책을 읽은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을 쓴 김신현경은 이화여대에서 여성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에서 박사후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여성학자다. 여성학이 다루는 이슈 중에서도 연애와 사랑, 젠더와 대중문화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있기는 한지) 모색한다.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접속>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가족 관계에 주목하지 않고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 끝나지도 않은, 당시로서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작품이다. 반면 2012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여자 주인공의 가족 관계가 시종일관 높은 비중으로 다뤄지며, 여자 주인공이 누구와 연애를 하고 누구와 결혼을 하는지가 곧 드라마의 줄거리이자 결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퇴보'가 외환위기 이후 가속화된 한국 페미니즘의 위기 및 한국 여성의 지위 하락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대학생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2010년부터 연재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을 보고 놀랄 것이다. 대학이 몇 안 되는 취업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전쟁터로 바뀐 요즘 같은 시대에 연애나 사랑은 언감생심일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 하면 경력과 평판을 망칠 수 있는 리스크 요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하지만 도움이 되는' 남자 주인공 유정과 사귀는 여자 주인공 홍설의 심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생존과 욕망 간의 딜레마(남자 없이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지만 남자 없이 살고 싶지 않다)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아이유의 <좋은 날>은 '삼촌팬'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노래다. 저자에 따르면 삼촌팬은 "걸그룹에 대해 '오빠'이고 싶어 하는, 즉 걸그룹을 성적 대상으로 욕망하는 데 대한 사회적 비난을 잠재우려는 시도를 반영"하는 용어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전 세대와 달리 기성세대가 되어도 새로운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할 줄 아는 개방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로 여기지만, 이들이 삼촌팬으로서 걸그룹을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소유물 취급하는 (그토록 이들이 구별되고 싶어 하는) 이전 세대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열광한 영화, 드라마, 웹툰, 소설 등을 통해 저자는 1987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페미니즘이 어떻게 변화하고 한국인의 연애와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조리 있게 서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드라마 <밀회>를 예로 드는데 그 설명 또한 무척이나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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