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 진화심리학이 퍼뜨리는 젠더 불평등
마리 루티 지음, 김명주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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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축구 이야기 싫어하는데 오늘만큼은 참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에 라디오를 듣다가 남성 진행자가 꺼낸 이 말을 듣고 빈정이 확 상했다. 얼마 전 치러진 대한민국 대 독일의 월드컵 예선 경기.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도, 승리를 기뻐하는 마음도 남녀 모두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여자는 축구 싫어한다'라는 잘못된 일반화를 이 상황에서 들먹이는 심리는 뭘까. 정말 '모든' 여자가 축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마리 루티의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는 진화심리학을 비롯한 과학이 주입하는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저렇다'라는 식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책이다. 저자가 진화심리학을 만난 건 사랑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연애 관련 자기 계발서를 읽던 중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비롯해 수많은 연애 관련 자기 계발서가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저렇다'라는 식의 편견을 조장하고 주입한다. 이런 책을 쓰는 저자들은 남녀가 심리적, 감정적, 성적으로 엄청나게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런 차이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저자의 연구와 분석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 중에는 틀린 것이 많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더 큰 것은 개인 간의 차이다. 흔히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라고 말하지만, 감성적인 남성도 많고 이성적인 여성도 많다. 남성은 포르노에 흥분하고 여성은 애정 표현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애정 표현을 좋아하는 남성도 많고 포르노에 흥분하는 여성도 많다. 남성은 젊음, 아름다움, 연약함에 끌리고 여성은 돈과 권력에 끌린다고 말하지만, 여성이 가진 돈과 권력에 끌리는 남성도 많고 남성이 가진 젊음과 아름다움, 연약함에 끌리는 여성도 많다. 즉, 성차보다 '케바케, 사바사'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남성은 가능한 한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자신의 자손을 번식하고 싶어 하는 존재다. 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더 갖고 싶어 해도 거부하는 남자, 여자가 임신했다고 하면 낙태를 권(하거나 아님 말없이 도망가는)하는 남자, 여자가 관계를 요구하면 정숙하지 않다며 차버리는 남자 등 수많은 반례가 있다. 여성은 성욕이 없고, 있더라도 생식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도 잘못이다. 성과 생식을 구분하지 않은 나머지 생식과 무관한 성애(예:동성애)를 폄훼하는 것 역시 진화심리학이 야기한 폐해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현대의 남성과 여성이 지난날의 번식 의무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는 개념에 질색하는 진화심리학자들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독립함으로써 해방된 여성들이 돈이나 지위 같은 전통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남성을 선택하게 된 것은 좋은 일 아닌가? 해방된 여성들이 남성의 자상함, 관대함, 위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멋진 일 아닌가? 마찬가지로 자식의 수가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아닌 세상에서 남성들이 생식력 외의 다른 이유로 여성을(또는 남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경이로운 일 아닌가? 요즘 남성들이 데이트하는 여성들에게 정서적 성숙함이나 직업적 야망 같은 것을 원할 수 있다는 것은 축하할 일 아닌가? (139쪽)


저자는 말한다. 여성성에 대한 틀에 박힌 관념과 오해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를 끼친다고. 정말 그렇다. '여성은 이렇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라는 식의 관념이 많이 남아 있는 사회일수록 '남성은 이렇다', '남성은 이래야 한다'라는 식의 관념도 많다. 남성성이란 결국 여성성에 대한 부정과 폄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축구 싫어한다'라는 말을 할 때 상처를 입는 건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뿐 아니라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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