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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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지은이:  홍대선

 : 낭만과 폭력의 한일 유신사

   모든 신념은 숭고해 보이지만 덧없다. 또한 모든 죽음은 덧없어 보이지만 숭고하다.  신념과 죽음이 다시 광기(狂氣)와 결합하여 숭고했으나, 덧없었던 역사 이야기를 이번 겨울에 읽었다. 일본의 사무라이와 유신(維新) 그리고 박정희(1917~1979)에 관한 역사 이야기다.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주제들을 저자 홍대선은 해박한 역사지식에서 연결점을 찾아내 고리를 만들었다.

이 책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는 일본 열도에서 태어난 유신(維新)이라는 정념(情念)의 일대기이자 유신심미주자의 (維新審美主義者) 고백이기도 하다.

   사무라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선명하다. 빠른 칼 부림 속에 피가 솟구치고 살이 떨어져 나가버린다. 삶과 죽음을 가르던 칼 끝에서 선혈이 떨어지는 순간 털어내 칼집에 다시 착검하는 장면은 영화 속 비정한 사무라이 모습이다. 이들은 살인과 피를 항상 몰고 다니는 자들이다.  그들은 적과 싸우다 죽기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명예를 위해 자신의 배를 가르는 할복과 그 뒤에서 개착(介錯, 카이샤쿠), 즉 할복자의 목을 내리치는 끔찍한 전통을 소위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여겼다.

  


작가 홍대선은 유신의 씨앗이 되었던 사무라이 정신의 기원을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일본 열도 침공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략은 당시 열도의 일본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였으며 그들은 지금도 '무구리코구리 (むくりこくり 한자어: 蒙古 高句麗)’ 라 하면 바로 공포와 분노를 뜻한다고 한. 이때의 공포감은 열도인들에게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형성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부세계와 외부세계로 바라보는 세계관이다. 내부세계는 열도인들이 사는 성스러운 본토이고 외부세계는 열도 밖에서 오는 침략자를 일컫는다. 외부세계에 의한 본토의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일본 사무라이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고 다행히 신풍(神風, 카미가제)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신들의 신토(神土)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에게 하나의 관념이 되어  이후에 유신이 자라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음을 저자는 믿는다고 했다. 다소 비약적인 논리이긴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갔다.

원래 유신이란 말은 사서삼경 서경(書經) 기록된 표현이라고 한다.

서경에 따르면 주나라( B.C 1046~ B.C 256) 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정비해 국난을 극복하고 되살아난 사건을 유신이라고 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76)은 막부를 뒤 짚어 엎은 신정부 세력이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표현을 서경에서 찾아내 유신이라 부른 것이다.

저자는 일본에서 일어난 유신이 훗 날 대한민국의 유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본래 유신이란 기존의 체제나 제도를 유지하되 새롭게 정비한다는 뜻을 지녔다.

그러나 이러한 뜻과는 다르게 실제 역사에서 한일 양국의 유신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끝에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졌다. 또한 유신으로 이룬 신정부는 천황을 앞세운 제국주의 길을 걷다가 전쟁 끝에 결국 패망하고 야 말았다. 한국에서 유신은 한때 관동군 장교 다카기 마사오로 불렸던 우리나라 산업화의 영웅인 동시에 독재자라 불렸던 대통령 박정희에게서 다시 부활했다.

하지만 박통의 유신은 결국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고백한 김재규의 총에 의해 완전히 사망하고 야 말았던 것이다.

한일 양국의 근현대사를 꿰뚫었던 유신의 일대기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사무라이 정신과 유신의 기원을 여몽연합군의 일본침공으로 잡은 것에 새삼 놀랐다. 이제껏 우리의 보편적인 반일감정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임진왜란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우리도 고려시대때 일본을 침략한 사실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시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 때문에 고려는 어쩔 수 없이 일본 침략을 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쟁이란 것이 어떻게 어쩔 수 없이 참전 했다고 대충 임할 수가 있을까? 더구나 당시 고려의 군사력은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몽고군에 끈질기게 저항할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여몽 연합군을 칭해 무구리코구리라고 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이민족이 자신들을 몰살시키려고 바다 건너서 쳐들어 오는데 어찌 공포가 아닐 수 있을까? 그것도 2차례나 대군을 이끌고 건너오는데 만약 일본인들이 믿는 신풍(神風)  가미가제가 없었다면 일본 이란 나라는 그때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일간의 서로 적대적 감정의 골은 상당히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일본의 우리나라 침탈은 그때의 업보가 아니였나 싶다. 그런데 업보 치고는 너무 과했던 것은 아니 였을까?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이 마침내 지나갔다. 동시에 혼란의 탄핵정국도 일단락되었다. 비록 봄은 왔지만 아직도 마음은 시리다. 정치적 신념이 신앙으로 되는 순간 점차 괴물로 변해 간다. 언론 매체는 겨울내내 괴물로 변해가는 정치 세력들의 아우성만 들려줬다. 어쩌면 또 다른 현대판 유신지사들이 출현한 게 아닌가 싶었다. 또한 그 와중에 황당한 죽음들이 우리 곁을 스쳐갔지만 그저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폭발하여 죽고, 산불에 타서 죽고, 학교에서 칼에 찔려 죽고, 앞으로 어떤 사고가 닥칠 지 예측 못할 죽음이 탄핵정국보다 더 불안했다. 우리의 지난 겨울은 비뚤어진 신념과 헛된 죽음이란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이번 봄에는 그 모든 상처들이 전부 치유되고 어서 빨리 회복 됐으면 좋겠다.


상상과 구체적 내용은 관념과 정념이다. 관념은 믿음이다. 유신의 믿음은 자신이 위대해지기 위해 남을 파괴해도 된다는 신앙이다. 정념은 욕망이다. 유신의 욕망은 스스로 아름다워지기 위해 죽어도 되는 자기파괴의 충동이다. - P33

동아시아 사대부는 자신이 죽어도 되겠다고 판단한 순간에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죽는다. 유신이 탄생하던 때, 거기에 뛰어들던 지사들의 투쟁은 가치 투쟁이다. 유신은 추상적인 명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동아시아 사대부 정신적 구조에서 가능했다. - P52

이제 유신 자체가 된 일본은 죽음을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옥쇄, 반자이 돌격, 가미카제는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 P204

박정희는 사람을 진영이 아니라 ‘결‘로 파악했다. 박정희는 민족지사 중에서도 백범 김구와 도마 안중근을 자신보다 위대한 남자로 추앙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지사는 아름다운 결로 완성된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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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6

오늘의정진: 大象不遊於兎經/대상불유어토경/큰 코끼리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 100일 정진, 102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서른 한 번째와 백 서른 두 번째 구절은

<日可冷月可熱/일가냉월가열/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중마불능괴진설/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을 부술수는 없다

象駕崢嶸漫進途/상가쟁영만진도/코끼리가 수레를 끌고 당당하게 길을 가니

誰見螳螂能拒轍/수견당랑능거철/사마귀가 수레 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였다.


()을 이루려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모아야 한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아 그 높이를 이루었고

강과 바다는 한 줄기 물도 마다하지 않아 그 깊이를 이루었다.> (사기, 이사열전 중에서)

선 역시도 태산과 바다와 같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마다하지 않아야 이루어진다.

높음와 깊음을 이루었다면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백 서른 세 번째와 백 서른 네 번째 구절

大象不遊於兎經/대상불유어토경/큰 코끼리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大悟不拘於小節/대오불구어소절/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으니

莫將管見謗蒼蒼/막장관견방창창/관견 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未了吾今爲君決/미료오금위군결/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댈 위해 결단해 준다.


이제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선사의 증도가(證道歌) 마지막 구절이다.

관견(管見) 이란 구멍 뚫린 관()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이 세상을 인식하는 아주 편협 된 견해를 뜻한다. 그러한 소견(小見)으로 어찌 큰 도(大道)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증도가의 첫 구절이 바로 <君不見/군불견/그대 보이지 않는가?> 였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사람들은 깨달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에 영가 스님은 증도가를 통해 밝혔던 것이다.

이제 다시 증도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君不見/군불견/그대 보이지 않는가

絶學無爲休道人/절학무위휴도인/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이 한가한 도인은

不求妄想不求眞/불구망상불구진/망상을 구하지도 참됨을 구하지도 않는다.>


()는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놓아야 한다. 즉 구하려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영가스님이 보여주려고 했던 무()의 세계는 사량 분별, 관견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이다.

보려고 해서는 보이질 않는다. 본다는 것은 보여 져야만 비로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놓고 지켜보아야 보인다. 눈뜬 장님들이 진정으로 개안(開眼) 되길 바라며 영가스님은 10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초월하여 묻고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의 눈이 떠 질 때까지 증도가 속의 영가스님은 계속 물을 것이다.

君不見! 그대여! 이제는 보이지 아니한가?


<일일 소견>

<大道無門千差有路/대도무문천차유로/큰 도에는 문이 없고 천 갈래 갈라진 길이 있나니

透得此關乾坤獨步/투득차관건곤독보/이 관문을 꿰뚫는다면 하늘과 땅 홀로 걷게 되리라>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스님, 무문관(無門關) 서문 중에서)

100일 정진은 끝났지만 진짜 정진은 이제부터 다. 허공을 홀로 걷게 될 때까지 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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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5

오늘의정진: 日可冷月可熱/일가냉월가열/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 100일 정진, 101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아홉 번째와 백 서른 번째 구절은

<大千世界海中漚/대천세계해중구/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 같이 있고

一切聖賢如電拂/일체성현여전불/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假使鐵輪頂上旋/가사철륜정상선/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정혜원명종불실/선정과 지혜 둥글고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였다.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은 불법을 닦는 목적이다. 위로는 보리 즉,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원이 담겨 있다. 중생 제도를 하려면 자비심(慈悲心)이 있어야 한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겪는 아픔인양 느끼는 자비심은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다. 유교에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라고 부른다. 이는 어진 마음 즉, () 한 마음에서 나온다. 불교의 자비는 지혜로운 마음에서 나온다. 인과 지혜는 다른 뜻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보리를 구하겠다는 마음은 선정(禪定)이 바탕이 되야 하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은 지혜(智慧)가 바탕이 되야 한다. 그러므로 선정과 지혜는 함께 닦는 것이 바로 상구보리,하화중생이다.


오늘은 백 서른 한 번째와 백 서른 두 번째 구절

日可冷月可熱/일가냉월가열/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중마불능괴진설/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을 부술수는 없다

象駕崢嶸漫進途/상가쟁영만진도/코끼리가 수레를 끌고 당당하게 길을 가니

誰見螳螂能拒轍/수견당랑능거철/사마귀가 수레 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해가 식어 버리고, 달이 타오르는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진리는 소멸되지 않는다.

마구니가 아무리 나를 시험에 들게 해도 나의 의지는 더욱 굳세어 지기 때문이다.

<立行不求無魔, 行無魔卽誓願不堅/입행불구무마, 행무마즉서원불견

수행하는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 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 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으로 삼으라 하셨다.> (보왕삼매론 중에서)

이렇게 보면 마구니는 나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데 필요한 조력자이다.

코끼리의 수레는 무겁고 당당하게 길을 간다. 사마귀가 아무리 사납게 길을 막는다고 해도 코끼리가 끄는 수레를 막을 수는 없다. 사마귀가 수레를 막아서는 것을 그 누가 볼 수 있는가?

밝은 진리를 마구니가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코끼리 앞을 막는 사마귀 같은 처지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본래 지닌 지혜와 선정의 힘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다. 결국엔 언젠가는 밝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 모두 불법의 바다에 이르고야 말리라는 보살의 서원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일 소견>

증도가 100일 정진이 끝나간다. 내일까지 해야 완전히 끝이 난다. 이번 정진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묵묵히의 재발견이다. 묵묵히 행함에는 힘을 모아 축적하는 것임을 알았다. 묵묵히 조용하게, 묵묵히 그냥, 묵묵히 지켜보는 등 묵묵히는 내공이 쌓이는 과정이었다.  

지금까지 묵묵(默默) 하게 마음의 묘목을 심었다면 이제부터는 잘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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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4

오늘의정진: 大千世界海中漚/대천세계해중구/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 같이 있고

- 100일 정진, 10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일곱 번째와 백 스물 여덟 번째 구절은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신수지차개상응/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로다

了了見無一物/료료견무일물/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였다.


지금껏 나라고 여겨 왔던 육체, 생각, 관념 등이 본래 공함을 알게 되면 라고 부를 것이 없다.

나는 본래 공하며, 나는 본래 없다. 그러니 무아(無我). 무아임을 안다면 참 나는 곧 드러난다.

태초부터 항상 참 나가 나를 이끌어 왔었다. 참 나가 있다는 것을 나의 껍데기에 가려져 알지 못했다.

무명업식(無明業識)을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중생과 부처가 각각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본래부터 중생도 없었고, 부처도 없었다.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었던 것이다.

참 나는 찾는 것이 아니고 참 나를 믿는 것이다. 현재 의식이 참 나를 믿는 만큼 의식과 참나는 서로 상응한다. 그것을 이름 지어 부를 수 없으니 무일물이요, 참 나요, 부처요, 주인공이요, , 영성, 아버지라 했던 것이다.


오늘은 백 스물 아홉 번째와 백 서른 번째 구절

大千世界海中漚/대천세계해중구/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 같이 있고

一切聖賢如電拂/일체성현여전불/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假使鐵輪頂上旋/가사철륜정상선/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정혜원명종불실/선정과 지혜 둥글고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모든 물질은 성주괴공, 생주이멸(成住壞空, 生住異滅)을 반복한다. 우주 또한 물질이니 태어나고, 지속되다, 무너진다. 우리 우주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는 없다. 태양이 아무리 뜨겁다 하나 결국 별성도 수명이 다 하면 꺼지게 된다. 우리의 우주가 아무리 광대해도 파도 치는 바다의 물 거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다. 지구상에 출현했던 그 위대한 성현들도 그저 스쳐갔을 뿐이다. 우주에서는 윤회의 수레바퀴만 돌고 있다. 그 가운데 본래 남이 없고 죽음도 없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있다. 그것은 오직 선정과 지혜로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붓다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밝혀 윤회에서 벗어나는 법을 안내했다. 선정은 정()이요, 지혜는 혜().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스님이 공부한 종파는 천태종이다. 천태종의 종지(宗旨)가 지관수행(止觀修行)이다. 지관수행은 바로 정혜쌍수를 닦는 수행이다. 선종에서 화두를 타파하여 얻는 것도 사실 선정과 지혜가 아니던가? 그러니 정혜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수행을 해야 한다. 내가 경전을 봐도 정혜를 얻고, 내가 절을 해도 정혜를 얻게 되고, 기도를 해도 정혜를 얻게 된다.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가져도 그 또한 정혜를 닦는 것이고,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거나 선행을 베푸는 것도 정혜를 닦는 것이다. 본래 우리는 정혜를 닦아야만 하는 존재로 생을 거듭했던 것이다.


<일일 소견>

광대한 우주도 무너지는데 어찌 나의 작은 세계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정되고 영원한 것은 없음을 잊지 말자. 본래 진리는 둥글게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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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4-05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진 100일 수행, 축하드려요.
뭔가를 100일동안 꾸준히 한다는게 쉽지 않은데 이루셨군요^^

2025-04-05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25-04-05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일 축하해요. 꽁시꽁시.

마힐 2025-04-05 22:50   좋아요 0 | URL
씨에씨에! 단쓰 워 하이 메이 지에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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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543

오늘의정진: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 100일 정진, 9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다섯 번째와 백 스물 여섯 번째 구절은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셔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일구료언초백억/한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 뛰어넘도다

法中王最高勝/법중왕최고승/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하사여래동공증/강 모래 같은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했도다> 였다.


법화경에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고 하여 불타는 집을 비유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부자가 사는 집에 크게 불이 났다. 때마침 아버지는 집 밖에 있어 위기를 벗어 났으나 그 집의 아이들이 아직 집 안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집 안에서 신나게 놀고 있느라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급한 아버지는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고자 꾀를 내어 아이들이 놀고 있는 집안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여기 양이 끄는 마차, 사슴이 끄는 마차, 소가 끄는 마차가 있는데 이걸 너희들에게 주겠다." 그러자 아이들은 수레를 얻고자 얼른 집에서 뛰어나왔다. 아버지는 기쁜 나머지 실제로 하얀 소가 이끄는 마차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비유에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방편(方便)을 썼듯이 부처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방편을 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화경에서 부처의 방편은 본질적인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지만 또한 진실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는 방편이 각각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래는 지금껏 수많은 방편으로 수행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여래의 은혜가 어찌 크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은 백 스물 일곱 번째와 백 스물 여덟 번째 구절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신수지차개상응/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로다

了了見無一物/료료견무일물/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내 여의주란 나의 근본 마음을 뜻한다. 믿는 다는 것은 나의 근본 마음, 즉 '참 나'를 믿는 것이다.

근본 마음은 본래 밝아 있지만 들여다보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한다. 무일물(無一物)이란 내가 없음을 말한다. 내가 없으니 상대도 없다는 뜻이다. 중생이 있으니 부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없으면 부처도 없게 된다. 그런데 무아(無我)라고 하면 '내가 없음' 이라고 하지만 여기서의 ', ()' '고정된 나'를 말한다. 따라서 무아는 고정된 나 라는 상()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분들은 무아와 참 나의 모순됨을 설명하려는 분들이 계시던데 그럴 필요가 없다. 무아와 참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자 해석에 치우치면 둘의 관계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뜻으로 보면 무아가 곧 참 나임을 알게 된다. 내 주인공 참 나는 여의주와 같고, 나는 본래 고정되지 않으니 무아인 것이다.


<일일 소견>

어제 저녁 설겆이를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묵묵히'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묵묵히 라는 말에 하나하나 쌓아가는 축적의 힘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들뜨지 않고, 초조 하지도 않고, 그냥 묵묵히 내가 하는 것은 그대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축적이 되는 거였다. 마음 하나, 행동 하나 묵묵히행 할 때 바로 내공이 쌓이는 중이라는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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