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9일차 

 

여후가 죽었다.

내게는 다른 항우가 죽은 것과 다름 없다.

전쟁터에서 항우를 마주한 다는 것은 공포 자체 였다. 궁정에서 여태후 또한 그러했다.

항우는 성밖에서 기세로 천하를 짓눌렀고, 여태후는 궁 안에서 눈 빛으로 사람의 숨을 눌렀다.

그들 앞에서는 숨소리조차 함부로 없었다.

 

사람들은 항우가 죽은 초한지가 끝났다고 말했지만, 틀렸다.

항우는 해하에서 죽었으나, 항우가 남긴 공포는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것은 여태후의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였던 것이다.

 

나는 원래 패왕 항우 곁에서 책사로 있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강함을 지켜봤다.

그는 기세로 사람을 압도했고 기세만으로도 사방을 떨게 만들었다.

반면에 여태후는 항우와 달랐다. 그녀는 항우처럼 기운으로 사람을 누르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여인의 몸에 깃든 냉담한 의지는 항우 못지않게 사람을 떨게했다.

그녀의 내려 보는 빛은 뾰족한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왔다.

여태후의 빛은 깊이를 없는 냉담함 속에 감춰진 날이었다.

항우가 성밖의 패왕이었다면, 여태후는 궁 안의 패왕이었다.

그래서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감싸야 했다. 그래서 숨을 죽였다.

 

왕릉은 나와 달랐다. 그는 곧은 사람이었다.

여태후가 여씨 일문을 왕으로 세우려 , 왕릉은 정면으로 반대했다.

한고조가 창업을 공신들과 함께 맹세한 *백마지맹(白馬之盟)  이유로 들었다.

맹약에서 유씨가 아니면 왕이 없고, 이를 어기면 천하가 함께 친다고 맹세를 했다.

왕릉은 맹약을 언급하며 우리를 향해 호통을 쳤다.

어찌 이제 여씨 집안을 끌어 들여 맹약을 깨려 하느냐고.

충신의 말은 옳다.

하지만 너무 옳아서, 오히려 그 자리에서는 쓸 수 없는 말이었다.

여태후는 불쾌해했고, 왕릉은 곧 파직 되었다.

곧은 말은 때로 사람을 빛내지만, 옳고 곧은 말이 나라를 살리지는 못한다.

 

나는 여태후 앞에서 절대로 맞서지 않았다.

우리는 고개를 숙였다.

여태후는 그런 우리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나는 왕릉에게 말했다.

조정 한가운데서 얼굴을 맞대고 다투는 일이라면 내가 왕릉만 못하다.

그러나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의 후사를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왕릉이 우리만 못하다.

 

나의 말은 변명이 아니다. 그것은 나만이 사직을 지키는, 왕릉과 다른 방식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처세라 부를 것이다.

맞다. 처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처세가 목숨이었고, 목숨이 있어야 다음 판도 있었다.

 

나는 고조께서 살아 계실 때부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비참한 말년을 지켜 보았다.

한신은 참을 줄은 알았으나 굽힐 줄은 몰랐다.  

팽월은 전쟁이 끝난 , 쓸모가 없어졌다. 영포도 마찬 가지다. 심지어는 고조와 같은 패현 출신이었던 노관과 번쾌까지 무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조가 사수의 정장시절 부터 대립했던 옹치는 말년까지 무사했고, 항우 집안의 항백도 항씨 후손을 이을 수 있었다.

이들을 보며 내가 깨우친 것이 하나 있다.

 

권력자에게 토사구팽을 당해 죽는 이유는 미움을 사서가 아니었다.

대개는 두려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밉상이어도 살아남을 있다.

그러나 황제가 두려워하는 순간, 그때부터는 그 사람의 목숨은 위태해 진다.

여태후 밑에서는 법칙이 잔인해졌다.

그녀 앞에서는 잘못된 한마디가 반역이 되었고, 지나친 충성조차 오히려 의심을 샀다.

칼이 안으로 들어오면, 밖의 요란한 전쟁보다 안의 소리 없는 전쟁이 더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그것을 너무나도 많이 지켜봤다.

그래서 너무 높이 날지 않으려 했고, 너무 앞에 서지 않으려 했다.

숨을 죽여야 때다. 여태후가 살아 있는 동안은 바로 그런 때였다.

여태후의 아들 유영, 혜제가 죽은 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유씨의 천하라기보다 자기 피붙이들을 왕으로 세우고 지키는 일이었다.

여태후에게 유씨가 세운 한나라는 점점 의미가 없어졌다.

그렇다. 그녀는 권력의 화신이라기 보다, 끝내 집착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집착은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나에게 기다림은 비겁함이 아니다. 적어도 이 궁 안에서는 그렇다.

 

나는 여태후를 섬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없었다면 한이란 나라는 바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녀를 거스를 없는 시간 속에서 목숨과 선제가 남긴 한나라의 다음 시간을 함께 저울질하며 버틴 것이다.

이제 여후는 죽었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절대권력이 사라진 자리는 바람을 부르고야 만다.

 

우리에게 선택해야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다시 한번 피바람이 세차게 몰아 것이다. 어서 움직여야 할 때다. 지체해선 안 된다.

살아 있는 , 진평(陳平) 여후의 죽음 이후를 수습해야만 한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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