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93일차
장막 안의 팽팽한 기운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은 차갑다.
쓱삭 하고 잘리는 허공의 소리는 어느새 빛을 쫓는다.
장막의 벽에 비춰진 춤추는 검은 그림자.
순간, 그림자의 손 끝은 날카로운 검이 되어 무섭게 한 곳으로 날아간다.
지켜보는 자에게 날아 오던 칼 끝이 어느새 다시 돌아 나와 그림자 속으로 감춰진다.
다시 검과 손 그리고 몸이 하나에서 각각으로 돌고 돈다.
어느덧 항장의 살기를 띈 검무는 점점 빠르게 날아 오르고 있다. .
장막의 고요한 정적 속에 지켜보는 자는 싸늘함만 느낄 뿐이다.
항장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검무의 마지막은 내 목이 하늘로 치솟으며 끝 날 것만 같았다.
살기등등한 패왕(覇王) 항우 앞의 패공(沛公) 유방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긴장을 감춘 웃음 밖에 낼 수 없었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 넣고 있는 심정이다.
*홍문의 연(鴻門宴), 유방은 그날 밤 연회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범증은 항우에게 홍문의 연회가 시작되기 전 세가지 계책을 세워 신신당부를 했다.
상책은 패공이 도착하는 즉시 함양성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그의 죄를 물어 목을 베어야 합니다.
만약 그게 안되면 연회 때 무장한 병사를 숨겼다가 제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병사를 보내 치십시요.
마지막, 하책으로는 유방이 술을 좋아하니 반드시 취하면 실수하게 될 테니 그때 가차없이 베십시요.
항우는 호방하게 웃으며 패공 유방의 목숨이 오늘 밤 다 할 것을 지켜보라 장담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는 속담이 바로 홍문의 연이라는 사지(死地)에 들어간패공 유방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유방은 그날 밤, 결국 호랑이 굴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고야 말았다.
어떻게 유방은 당대 최고의 책사 범증이 설계한 그 사지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
항우의 숙부 항백의 도움 때문인가. 아니면 진평의 거짓으로 따른 술잔 때문인가. 아니면 번쾌의 목숨을 건 술 대작 덕분인가.
춤추는 칼 날 끝에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 수 있었던 홍문연에서 살아나온 유방은 과연 정말로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것일까.
사실 초한지에서 가장 긴장감을 드러낸 장면이 바로 홍문에서의 연회이다.
누가 봐도 유방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기 딱 좋은 조건을 가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방은 그 사지에서 살아 남아 천하쟁패의 승리자가 되었다.
유방이 이날 밤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여러 조건 가운데 가장 밑바탕이 된 조건이 있다면, 유방의 운도 아니고 어쩌면 나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유방의 나이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약 50세이고 항우는 24세 정도 되었다고 한다.
둘이 진의 수도 함양을 치기 전에 의형제를 맺었는데 나이가 많은 유방이 형이 된 것이 아니라 항우가 형이 되었다. 16살 차이나 나는데 까막득하게 젋은 항우가 형이 되고, 나이 많은 유방이 동생을 자처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내세울 게 별로 없을 때 나이를 가지고 마지막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일부 꼰대라고 부르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사실 내세울 게 별로 없으니 나이라는 계급을 내세운다.
사수의 정장이자 도망자 우두머리, 그리고 패공이 된 유방은 정말로 내세울 게 ‘나이’ 밖에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16살이나 어린 항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동생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유방은 내세울 게 나이 밖에 없는 사람이 오히려 나이를 초월할 수 있었을까.
사실 유방은 항우와 같은 세대가 아니다. 오히려 진을 통일한 진시황 보다 고작 3살 어린 나이였다.
즉 유방은 진시황 과 같은 세대로 항우 같은 나이는 자신의 아들 뻘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방은 항우보다 인생의 경험이 더 넓고 깊었다.
진시황의 굴기와 몰락을 지켜봤으며 스스로 마을 건달 노릇하며 인간 본성과 심리를 누구보다 잘 파악했었다. 이건 나이가 젋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경험치 인 것이다.
사람들은 유방이 사람을 잘 쓰는 용인술이 항우보다 훨씬 좋아서 천하를 차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깊은 층엔 나이가 항우보다 많아서 였다고 하면 나만의 비약일까.
굽힐 장소에서는 굽힐 줄 알며, 뻣뻣하게 곧을 장소에선 뻣을 줄 아는 자. 그자가 바로 유방이였다.
만약 유방이 항우와 같은 세대 였다면 의형제를 맺는 자리에서 은근히 자존심을 내 세웠을 것이다.
유방의 인생은 항우보다 한 세대를 넘는 경험치가 있었기 때문에 형, 동생이란 허울은 아무런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나이가 많아 경험치가 많다는 것은 사지에서도 누구 보다 침착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는 그렇게 자신이란 틀을 부순 사람이다.
이미 ‘나 라는 상(我相)’ 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사신도 범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만약 유방이 젊었다면 결코 홍문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점점 나이를 내세우는 꼰대가 되어 간다면 유방을 한번 떠올려 봄도 좋을 듯하다.
나이는 계급이 아니라 경험의 표식이다.
나의 홍문연은 아직 진행 중이다. 나는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주: *홍문의 연(鴻門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먼저 차지한 사람이 관중 왕이 되는 조건을 초회양이 걸었다. 유방과 항우는 각각의 군사를 데리고 서쪽과 동쪽에서 출발했는데 결과적으로 유방이 먼저 함양을 점령했다. 후에 항우가 이 사실을 알고 함양에 진입하려 했지만 유방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항우는 함양 근처 홍문이란 곳에서 유방을 불러 연을 베풀었다. 사실상 죽음의 연회였다.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