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100일 정진 89일차
전국시대, 중원을 차지한 일곱 강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패권 다툼은 끊이질 않았다.
그 혼란한 시대에, 열세 살 어린나이로 진(秦)의 왕위에 오른 소년 정(政)이 훗날 천하를 통일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중원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진은 마침내 여섯 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정은 스스로를 시황제(秦始皇帝)라 칭했다.
이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곧 그의 것이었다.
그는 아방궁을 짓고, 천하의 부와 권세를 손에 쥔 채, 자신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기를 꿈꾸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능의 끝에 서서, 그는 자신의 제국 또한 영원하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소불위 (無所不爲)한 시황제에게도 끝내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북방의 흉노들였다.
오랑캐 흉노는 굶주린 이리떼처럼 끊임없이 제국의 경계를 흔들었다.
그들이 날 뛰는 황무지와 자신이 다스리는 풍요로운 제국 사이에 필요한 것은 경계를 세우는 것이다.
시황제는 북방의 요새와 성벽들을 연결해 거대한 방어선을 세우도록 했다.
방어선은 어느 덧 그 길이가 만리나 이르렀다.
훗날 사람들은 그것을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장대한 성벽은 황제의 위엄으로 쌓인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여섯 개국의 백성들의 땀과 피, 그리고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죽음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에 끌려간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성을 쌓다 죽으면 그 시체를 그대로 흙과 돌 사이에 벽으로 만들어 묻어버린다고 했다. 그 노역은 언제 끝날지도,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될 지도 모를 잔인한 일이었다.
그 무렵, 패현사수(沛縣泗水: 지금의 강소성 서주) 지역의 조그만 정장(亭长: 오늘날 파출소장)출신인 유계(劉季)에게도 제국의 명령이 떨어졌다.
죄수 백 여명을 호송해 북방 노역 현장으로 데려가라는 명령이었다.
유계는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별다른 재주 없이 동네에서 하는 일이라곤 껄렁거리며 건달처럼 살아왔다. 굳이 재주라고 한다면 제법 허풍 떨 줄 알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형님처럼 챙길줄은 알았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점 때문에 우습게 보면서도 이상하게 따랐다.
그런 유계에게 생애 처음으로 제국의 중대한 호송 임무가 맡겨진 것이다.
정해진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호송 하던 죄수가 한 명이라도 모자랄 시 호송을 책임진 유계는 목을 바쳐야만 했다.
왜 하필이면 내가? 라는 생각에 유계는 자신에게 일을 맡긴 소하(蕭何) 나리가 원망 스러웠다.
패현의 하급 관리 였던 소하는 평소에 사고를 치는 유계와 그 패거리들을 여러 번 감싸주곤 했다.
이번에 소하 나리가 어쩔 수가 없다고 맡긴 일인데 이렇게 된 바에 그동안 신세진 것 갚는 셈치자.
유계는 대나무로 죄수들을 모두 고정 시키고 백명을 한 명이 움직이는 양, 앞에서 진두 지휘를 했다.
과연 유계는 호송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을까.
유계 일행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제 시간에 닿기 위해 밤길에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게다가 어느 순간 인원 수를 세어보니, 몇몇 죄수들은 이미 틈타 달아난 뒤였다.
아, 이제 어떻게 한다지?
제 시간에 도착 못해서 죽게 될 것이고, 설사 제 시간에 맞춘다고 해도 도망친 인원 때문에 또 죽게 될 텐데... 이를 어쩐다?
순간 유계는 죄수들을 돌아다 봤다.
죄수라고 하지만 그건 폭정을 일삼는 진시황의 입장에서지, 사실 이들 모두 망한 육국의 백성들 아닌가.
그들이나 자신이나 불쌍한 백성에 불과 한데, 이제는 서로 같은 죄인으로 모두 목이 잘리겠구나.
그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자, 너희들 모두 풀어 주겠다. 해방이다.
어차피 우리는 노역 현장에 가면 모두 죽는다. 그럴 바엔 지금 당장 제 살 길을 찾아 흩어져라.
도망쳐라. 살려고 한다면, 지금 이때 뿐이다.
유계는 죄수들을 풀어줬다. 그리고 그 순간 부터 자신도 도망자가 되었다.
이제 유계는 더 이상 사수의 정장이 아닌 죄수를 놓아준 죄인이자 자신도 달아나야 하는 도망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흩어진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오히려 유계를 따르기로 작정했다.
그들 역시 어디로 달아나도 결국 죽을 운명이라면 차라리 자신을 살려준 유계와 함께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유계는 이제 자신을 따르는 망국의 백성들을 이끌고 산속으로 숨었다.
다시 일개 도망자에서 도망자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이 도망자들의 우두머리가 훗날 막강했던 진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차지하게 되리라고는, 그 당시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수의 정장(亭长) 유계(劉季), 그가 곧 한 제국을 세운 유방(劉邦: B.C 246~B.C 195: 출생은 여러개의 이설이 있다.)이다.
이 날 유방에게 죄수 해방이라는 결단이 없었다면 역사 속에서 한나라는 없을 것이다.
초한지(楚漢志)는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쟁패를 다룬 역사 소설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유방보다 항우를 먼저 거론한다.
나 역시도 젊을 때는 항우의 휘황찬란한 무력에 열광했다.
하지만 나이를 어느 덧 먹고 보니 그에게 한참 못 미치는 유방에 더 끌리는 이유는 뭘까.
유방, 그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든다.
주: *무소불위 (無所不爲):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즉 권능의 최정점을 뜻함.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