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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 어느 장례지도사가 말해주는 죽음과 삶에 관한 모든 것
강봉희 지음 / 사이드웨이 / 2021년 10월
평점 :

책 제목: 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지은이: 강봉희
제 목: 죽음을 준비하라
8년전쯤에 중국 북경에서 내가 겪었던 일이다.
주말 오후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다급한 회사 사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북경에 있는 어느 병원으로 직원 몇 명을 데리고 빨리 오라는 사장의 지시로 영문도 모르게 급히 갔었다.
병원에 도착 후 자초지종을 확인해 보니 사장의 아주 먼 친척 뻘 되는 4인 가족이 북경 자금성에 관광을 왔는데 그 가족의 아빠에게 갑자기 심장 마비가 온 것이었다.
자금성이란 장소도 문제 였지만 하필 시간대도 가장 붐비는 오후라서 구급차가 자금성 안으로 들어 오기 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겨우 구급차가 들어오고 환자를 가까운 병원으로 다시 옮겨 심폐 소생술을 진행 했지만 결국엔 사망하고야 말았다. 집안 가장의 황당한 죽음을 객지에서 겪게 된 아내분과 두명의 딸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병원에 대사관 직원이 뒤 늦게 도착했지만 별 다른 도움이 되 질 못했다.
이때 중국 병원측은 응급실에서 사망을 하면 시신을 유족이 직접 영안실로 옮겨야 한다며 유족들에게 빨리 시신을 영안실로 옮기라고 했다. 영안실 안치와 영안실에서 화장장으로 이동하는 관(棺)까지 유족이 손수 시신을 옮겨야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당연히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 (최근에 다시 안 사실이지만 당시에 우리는 외국인 신분이라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 남겨진 유족들은 전부 여성 분들이고 중국어도 전혀 몰라서 우리가 직접 나서서 유족대신 뛰어 다녀야 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영안실에 가보게 되었고 또 시신을 꺼내서 이동용 침상에 옮기는 일을 해봤다.(중국 병원의 영안실은 정말로 음침했다)
시신은 중국식의 화려한 천에 감싸져 있긴 했지만 시체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셈인데 그 이후로 죽음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 장인 어른의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전에 읽었던 능행 스님의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을 읽으며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 할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었다.
이때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 는 생각이 점차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이번에 비슷한 주제를 다룬 <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책을 통해서는 고독사와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 강봉희님은 현재 장례 지도사이며 소위 '시체를 닦는 일' 을 하시는 분이다.
한자어로 ‘염습(殮 염할 염, 襲 염습할 습)’ 이라고 하는데 웬만한 담력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날 무슨 상조 회사나 웬만한 장례식장에 들어 가는 비용은 대략 4~500만원 선으로 알고 있다. 그것도 최소한 이라고 하는데…
저자 강봉희님은 이러한 염습과 장례를 돈을 받고 하는 처리하는 분이 아니다.
스스로 자원 봉사단을 꾸려서 시청과 연계해서 관할 지역내의 기초 수급자 분들이나,가족이 없이 홀로 쓸쓸히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까지 무료로 해주고 있다. 즉 저자에게는 무연고로 고독사를 맞이한 사람들이 주고객이 되는 셈이다.
그 분들의 쓸쓸한 죽음을 마지막으로 외롭지 않게 지켜 드리는 일에 나름 자부심과 보람을 가지고 한다는 면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저자 강봉희님은 40대 중반, 방광암 진단을 받고 5년 이상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원래 강인한 정신을 가진 그였지만 장기화 되는 병 치료에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그 당시 병실에 누워 바라본 창문엔 병원 장례식장이 눈에 들어 왔다고 한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자신이 만약 살아서 저 장례식장 옆의 병실 밖을 걸어 나간다면 무언가 인간 답게 살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그 한 생각이 그를 죽음 문턱에서 벗어 나게 했고 결국엔 그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20년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 과정 중에서 코로나 초기 아무도 접근 조차 하지 않던 코로나로 돌아가신 환자분의 시신을 수습 했고, 그 외 수많은 고독사와 기초수급자들의 마지막을 돌봐 주었다.
현재 우리나라 고독사의 비율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13년은 1280명, 2017년은 2008명, 2021년은 3603명을 기록 했다.
코로나 이후 2022년은 4822명이며 2023년은 이미 5천명을 훌쩍 넘어 버렸다.
이미 사회 문제가 된 고독사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본다.
고독사를 맞이 한 사람들은 그들이 본래 가졌던 구성원의 관계가 무너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러한 무연고자들은 살아 있을 때부터 잊혀진 사람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쓸쓸히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홀로 저승으로 가지 않도록 돌볼 수 있었다. 그런 의무를 내 팽개친 채 고독사를 입으로 떠드는 우리 사회가 원망 스럽다> 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독사에 대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많은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베이비 붐세대의 나쁜 아빠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적이다.
그는1950년대 중반과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베이비 붐세대 남자들이야 말로 가장 나쁜 세대라고 규정 짓는다.
베이비 붐세대는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세대이기도 하지만 그들 세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가정을 버리고 가장의 책임을 져버린 가장 나쁜 남자들의 세대 였다는 것이다.
베이비 붐세대가 지금의 나보다 윗 세대라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대략 내가 아는 이 세대 남자들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것 같다.
그 외 우리나라 장례 문화는 남에게 보여주는 관습이 많은데 이는 누군가의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다.
죽을 때 입는 옷을 '수의(壽목숨 수 衣 옷 의)'라 한다. 원래 죄수들이 입는 '수의 (囚 가둘 수 衣 옷 의)' 에서 기인 된다고 보았다. 왜냐면 둘 다 삼베로 만든 옷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890년대 에서 일제 강점기 때 죄수가 삼베 옷을 입는 것에서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죄인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 조선시대 같은 전통 장례에서는 삼배를 입질 않았다고 한다.즉 수의로 삼베 옷을 입는 것은 잘못된 전통이란 것이다. 또한 본래 삼베는 대마초에서 재배해야 하는데 대마는 알다시피 마약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마초 재배는 불법이며 또한 지금 유통되는 삼베는 모두 합성 섬유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신에 굳이 삼베 옷을 입히는 것은 장례 업체들의 장삿속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한 장례식때 고급 리무진에 시신을 태우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산자와 죽은자에 대한 예의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망자와 유족에게 행해지는 불필요한 장례의식은 장례업자에게 돈벌이가 되는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따끔한 충고는 새겨 들을 만 하다
8년전에 겪었던 남의 갑작스런 죽음과 서서히 다가 오는 죽음, 죽음의 형태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메멘토 모리(memento moli), 죽음을 기억하라' 고 하는 라틴어 구절 처럼 이제 나에게 죽음은 점차 기억할 무언가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의 나에겐 여전히 많이 낯설지만 급하지 않게 천천히 받아들이고 싶다.
죽음, 준비해야 한다.
죽은 이들에게 우리가 갖추어야 할 어떤 예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있다고 믿고 있다. - P28
쓸쓸한 죽음을 마지막으로 외롭지 않게 지켜 드리는 일, 나는 그 일에서 조그만한 자부심을 느낄때가 있고 그럴때면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자랑하곤 했다. - P32
돌아가신 분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몸안에 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죽은 몸에 그 고통의 흔적들을 다 담고 있다. - P38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치인데도, 우리는 항시 생과 사를 철저하게 끊어놓는다. - P84
죽음을 준비하라. 마음으로 준비하고 몸으로도 준비하라. - P134
핏줄은 우리 인간의 괄호안과 같다. 괄호안은 무조건 먼저 계산해야 한다. 핏줄의 의무다. 서로 자주 연락을 나누고, 서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계기를 계속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배려의 시작이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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