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5
강항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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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강항 씀, 김찬순 옮김

 

<선조 정유년(1597) 2월 형조좌랑의 신분으로 나는 전라도 영광에서 부모님과 휴가중이었다... 5월 17일 명()의 부총병 양원은 남원으로 군사 3천을 이끌고 내려왔고 나는 군량을 공급 관리하며 운반을 감독하는 종사관으로 배치되었다.

7월그믐 원균은 한산도를 지키지 못하며 패했고 남원을 향한 왜군의 창끝에 양원은 도망치고 끝내 남원성은 무너져 버렸다... 9월 14일 적은 이미 영광을 불지르고 산과 바다를 샅샅이 뒤져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였다...  나는 식솔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9월 20일 나는 새로 임명된 통제사 이순신있는 우수영으로 가기로 했다. 두배에  장정이 모두 마흔이나 되니 통제사를 따라가서 나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사공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탄배와 아버지가 탄배가 떨어지는 바람에 아버지를 찾으러 섬을 돌아다니다가 느닷없이 왜선에 잡히고야 만다....>본문 서두 부분 요약.

 

 

 

내가 중국에서 20여년 생활하면서 가장 아쉬운점 하나를 꼽으라면 보고 싶은 한국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수 없다는 점이다.

이번달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이순신 장군의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너무 너무 보고 싶은데, 그럴수 없다는게 참으로 아쉽다.

 

 

 

비오듯이 쏟아지는 총탄과 화살 세례, 바다와 하늘을 흔드는 불 뿜는 총통의 포에서 나오는 연기들, 그 가운데 끊이질 않는 우리 병사와 왜놈 들의 고함소리 속에서 나는 다리를 움켜 잡고 있다. 화살이 허벅지를 관통했다. 누가 쏜 화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싸워야 한다. 온몸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되었고 지옥같은 전쟁의 한복판에 내가 누워있다. 고통스럽다.

그순간 눈이 떠졌다. 꿈이었다.

내가 어릴때 꾸었던 꿈 내용이다. 이 꿈을 깨고나선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 드라마에서는  ()김무생 배우가 이순신 장군을 열연 하였었다. 아마도 그 날 전쟁장면을 보고 꿈을 꿨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임진왜란으로 생각되는 전쟁 장면이 나의 기억속에 꿈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런데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혹시 그 꿈이 내 전생이 아니였을까 하는 망상이 가끔 든다.

혹은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라 전체가 집단 무의식으로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의 역사들을 잠재의식에 깊이 각인 되어 진게 아닐까 ?

결국 영화의 영향으로 다시금 이 책 간양록을 꺼내어 읽었다.

 

 

임진왜란, 그 당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역사나 매체, 각종 책을 통한 내용은 풍부하다. 하지만 그 당시 끌려간 포로에 대한 내용은 그다지 많이 다루지 않는것 같다.

'도자기 전쟁' 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수많은 도공(陶工)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는 내용의 다큐는 있었던 것 같다.

 

 

이 책 <간양록>은 임란시기, 정확하게는 정유재란때 '강항'(姜沆:호는 수은1567~1618) 이란 선비가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몸소 겪은 일은 '나'의 시점으로 보고 듣고 느낀것을 남긴 글이다. 굳이 분류를 한다면 기행문이라고 할 수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기행문은 아니다. 책에는 전쟁의 참상과 포로 생활의 고초, 일본에 대한 증오, 특히 전쟁의 원흉인 풍신수길에 대한 저주와 조선 선비로서의 충절, 임금에게 전하는 간곡한 상소문 까지  모두 담겨져 있다.

 

포로로 잡혔으나 관원이란 이유만으로 강항은 죽음을 면했지만 포로로 수송되는 과정에서 죽어가는 가족들을 보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마음과 일본에서 감시를 받는 가운데 목숨을 건 탈출 시도와 실패,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남은 일, 뇌물을 주고 중국 사신을 만나는 장면, 몰래 수집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은밀하게 조선의 임금에게 까지 전달되는 장면등 긴장감 있는 첩보 영화 한편을 보는 기분이 든다.

 

 

특히 강항은 풍신수길을 향해서 격분에 찬 글을 쓴 후 그것을 성문에 붙히는 장면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선비의 선비정신 기개를 느낄수 있었다.

<...중략...너희는 제 땅이 있으면서도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남김 없이 죽여 없애려 하니 해와 달이 어찌 너희 아침을 받으며 석가가 어찌 너희 불의를 용서하랴!....지금 동방을 맏은 부처를 보내어 글로 너희 군신에게 이르노니 너희 군신이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큰재앙을 너희 나라에 내릴것이다.... 나는 두말을 아니한다. 너희는 후회함이 없을지어다....중략..>

강항은 이 글을 쓴후 풍신수길이 6월 초부터 병에 누워 죽었으니 이 말에 효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강항의 포로 생활중 가장 큰 운명적인 사건은 순수좌(舜首座: 후에 개명하여 '후지와라 세이카')와의 만남이다.

후에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에게서 유학을 배운후 도쿠가와 막부의 스승이 된다. 

나는 이장면을 떠올리면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강항은 본래 유학자이므로 불교를 숭상하지 않는다. 그런데 풍신수길을 향한 격노의 글에는 부처를 내세운다.

그리고 후지와라 세이카는 원래 스님이였다. 강항에게 유학을 배워 제자가 된 이후 부처를 떠나 유학자가 되었다.  스승은 부처의 힘을 찾았고, 제자는 부처를 벗어났다.

물론 강항도, 제자 후지와라 세이카도, 각자의 신념을 떠난게 아니고 오히려 일본이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나라를 유학으로 기틀을 세우고 한단계 성숙한 나라가 되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이런점에서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로 이어지는 유학의 법맥은 이후 이에야스에 의해 통일된 일본을 다스리는 이념으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이 이념은 도쿠가와가의 에도 막부시대 260년을 지탱 시켜준 근간이 되는것이다.

 

 

 

마침내 강항은 4년의 포로 생활 끝에 1600년 5월 제자의 도움으로 자신을 식솔을 포함한 조선인 포로 38명을 데리고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강항은 선조를 만났다. 그전에 강항은 이미 여러 루트를 통해 3번이나 조정에 자신이 직접 몸소 보고 듣고 느낀 일본의 실정을 상소해 올렸었고 또 다시 상소 글을 올린다.

그후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겨 곧 바로 사직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양성했다. 그때 이 책 간양록이 나온것으로 보이는데 강항이 이 글을 쓸 때 원래 제목은 '건차록(巾車錄)' 으로 지었다고 한다. 

건차는 죄인을 호송하는 차량을 말한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낮춘것을 제자 윤순거 가 펴낼때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치게 된다.

 

간양(: 볼 간, 양 양) 은 글자 그대로 '양을 보다' 는 뜻이다.

'간양' 에 대한 유래는 참으로 오래 됐다.

제자 윤순거(1596~1668)는 스승 강항의 일본 포로 생활을 한나라 시대 흉노에게 잡힌 소무(蘇武: B.C 140~60)에 비유했다.

간양이란  소무가 북해에서 19년간 양을 치며 흉노 선우의 회유와 협박을 거부하며 절개를 지켰다는 고사에서 유래 한다.

이 부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찾아 보면 좀 더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다.

 

한나라 무제 시절(B.C141~87) '소무' 라는 한나라 장군이 흉노에 사신으로 왔다가 흉노에 사로 잡히게 된다.  소무의 절개 감동한 흉노의 선우(왕과 동격) 회유를 하지만 소무는 한나라의 지조를 지키고자 회유를 거부하게 된다. 이에 화가난 흉노의 선우는 지금의 바이칼 호수 근처로 유배를 보내고 19 동안 양을 치게 한다. 무제가 죽고 한나라 조정과 흉노가 평화적으로 화친을 함에 따라 외교정책의 변화로 소무는 한나라에 돌아 오고야 만다. 그렇게 한나라로 돌아온 소무는 '충절의 상징' 되어 버린다.

 

(참고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하중에 김완(金浣:1546~1607) 장수가 있었다. 그는 원균과 칠전량 해전에 참가 했다가 대패하는 과정에서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김완은 일본을 탈출하여 조선에 돌아오는데 조선의 선조는 김완에게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했다. 그만큼 '소무'는 충절의 대명사이다.)

 

 

'간양'이란 '소무가 19 동안 적지에서 양치기를 했다' 이야기에서 유래한 '충절' 뜻하는것이다.

여기서 연관 되는 하나의 뜻깊은 사건은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유래' 들수 있다.

소무가 흉노 땅에서 양치기를 하고 있을때 동시대에 '이릉()'이란 한나라 장수가 흉노와 싸우다 붙잡히게 되었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으로 3만의 흉노 기마병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잡히게 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싸움' 임에도 불구하고 이릉은 용감히 싸웠다. 하지만  결국 사로 잡히게 되고 후에 이릉은 선우에게 포섭이 되고야 만다.

소식을 전해 들은  한무제는 폭발하여 이릉 집안의 삼족을 멸하고자 하였다. 수많은 신하들이 잠자코 있었는데 그때 오직 사마천만 이릉을 변호 했었다고 한다.

당시 사마천은 일면식도 없는 이릉을 위해 당시 상황에 근거하여 이릉의 입장에서 변호 했다가 오히려 한무제에게 노여움을 사게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죽음보다 치욕적인 궁형에 처해지게 된 이유이다.

결국 사마천은 자신의 남성을 버리는 고통과 굴욕을 극복하고 인간 능력의 최고의 정점을 붓끝으로 집약하여  '사마천의 사기' 탄생 시키게 된다.

사마천이 변호했던 이릉은 훗날 소무가 19 포로 생활 끝에 한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서로 만나게 된다.

소무와 이릉의 만남.

이릉은 가고싶지만 돌아갈수 없는 자신의 처지(자신은 이미 충절을 버린셈이 된것이고 또한 고향의 집안은 이미 멸문지화를 당했다) 19년을 양을 치며 충절을 지키다가 결국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소무와의 엇갈린 운명앞에서 동시대의 두 주인공은 서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음이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듯 하다.

 

 

간양록 속에 담긴 16세기말 조선시대 선비 강항의 충절과 2000년전의 소무와 이릉의 엇갈린 운명속의 충절을 생각하면 시간과 공간이야 다를지 언정 하나로 이어지는 운명이 느껴진다.

 

 

나를 만약 한()의 소무(蘇武)에 비춰보면 나도 이미 23년이 넘게 중국에서 살고 있다. 현재 나에겐 내 가족이 양이다. 양이 다 클 때 까지 아직 중국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내가 돌아가야 할 우리나라. 대한민국.

돌아갈 그날이 올때 까지 부지런히 공부해 놓고 있어야 겠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어린양을  돌보는 목자에 비유한다.

나는 내 내면의 어린 양을 키우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간양, 양을 잘보는것. 여기엔 많은 뜻이 담겨 있는것 같다.

 

 

(만약 간양록을 보기전에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망>이란 소설을 먼저 읽고 난 후 간양록을 본다면 강항이 수집한 당시 일본의 정세를 담은 내용이 쉽게 이해가 될 듯 하다. )

죄 없는 널 죽였구나 모두가 내 죄여라
백 년 두고 통분해 눈물 언제 마르리. - P22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마에 땀이 나는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무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나는 글 읽은 사람이 아니던가!

..... 중략

만권 서적 읽은 서생 면목이 바이 없네
이태 동안 궁진 신세로 양 치고 있으니.
- P29

한평생 경영한 게 한 줌 흙 된단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구나
탄알만 한 네 땅 지금 남의 손에 갔느니라
무슨 일로 청구 땅에 당돌히도 대들었나 - P31

방비를 위한 충언
관원을 임명할 때 가문을 묻지 마시고
장수들이 백성을 침탈하지 말도록 하옵시고
지리와 성읍 제도를 살펴 고치시길
항복한 왜군을 죽이지 마시고 거두어 주시길
무기를 날카롭게 갖추시옵고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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