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1.

"인연을 믿나요?"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믿나요?” 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글쎄요..” 라며 뜸부터 들일 것 같다. 하지만 “인연을 믿나요?” 라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럼요” 라고 답변할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이라 했던가. 만남과 헤어짐. 나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관계는 인연이 닿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세월이란 게 느껴질수록 그 연(緣)이라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온다. 요시다 슈이치, 그의 작품을 읽게 된 건 그러한 ‘인연’에 의한 것이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인연 말이다.


2.

 『동경만경』은 나의 외로움을 털어놓게 했다. 마치 “외로워 보이는 사람에게는 자기도 외롭다고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은”(p. 113). 위로라는 게 그저 내 마음을 아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되는 거라면, 나는 『동경만경』에서 충분히 위로를 받은 셈이다.
 

3.

  료스케가 어둠 속에서 미오에게 “놀랐어?”(p. 160)라고 물었을 때 그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을 만큼, 나는 료스케의 마음에 혹은 미오의 마음에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빠져들었다. ‘빠지다’라는 건 영혼의 문제라(p. 120) 하는데,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은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는 느낌처럼 빠져들게 한다. 그 강물 위로 반짝이는 햇살과 함께 한없이 걷고 또 걷게 만드는 어떤 그리움 같이. 
 

4.

  동경이라든가 린카이 선 개통이라든가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동경만경』 속 배경들이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서울이라든가 지하철 2호선이라든가 하는 내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방향의 지하철을 타야할지 노선표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지 않고도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는 나를 보았을 때, 나는 드디어 서울에서의 생활을 실감할 수 있었다. 소거법(消去法)(p. 247). 몇 년 후쯤 서울 생활을 돌아보게 될 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누군가의 얼굴일까? 전철일까? 이기호의 단편 중에서 국기게양대를 사랑하는 남자가 나온다. 나는 전철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5.

 “료스케와 헤어지는 게 아니라 료스케의 몸과 헤어질 뿐이라고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준비였는지도 모른다.” (p. 263)
 

 그녀의 고민에 료스케는 아주 명료하게 답변을 건넨다. “그런데도 너와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p. 273) 중요한 건, 몸과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 몸을 좋아했든 그를 좋아했든 현재 함께 있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우리들은 종종 잊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고민으로 중요한 순간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6.


끝나지 않는 게 있을까? p. 270


 료스케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일 만큼 그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의 곁을 마음이 제멋대로 떠났다는 것. 영원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부재’ 관계가 성립할 때 가능하다. 요컨대, 영원한 헤어짐이 전제될 때 비로소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은 허망한 소망에 불과할까?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영원한 사랑은 삶의 희망이니까. 미오의 동료가 “시작하는 게 두려워서 두 사람 다 눈을 질끈 감고 서로 안기만 하는 거 아냐”(p. 286)라는 말을 들려줬을 때, 아마 두 사람은 질끈 감은 그 눈 속에서 희망을 가져봤던 것은 아닐까?

 

 “내일도 만나.”라고 청년이 말한다. “…… 내일도, 모레도.”라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에도.”라고 모니카가 대답한다.
“그 다음에도”
“오늘밤도.”
“8시에 늘 만나는 곳에서.”
(...)
그러나 그날 밤, 두 사람은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의 라스트 신에는 단지 그 장소만이 비춰진다. 두 사람이 오기로 했던 그 곳. 두 사람이 ‘늘 만나던 곳’이라고 불렀던 거리의 도로만이 연이어 다양한 각도로 비춰질 뿐이다. ‘늘 만나던 장소’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늘 만나던 곳’에 버스가 선다. 그 버스에서도 그들이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 장소만이 계속 비춰지면서 영화는 끝나고 만다. (p.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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