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멜리 노통브와 만나는 첫책이다. 다작을 한 작가의 책을 만나게 될 때 어떤 책으로 만나느냐, 역시 서로의 운이라고 생각하는데, 노통브의 여러 책 중에서 <<적의 화장법>>(이하, <적>)을 만난 건, 확실히 독자 입장에서는 서로에게 '운 좋은 첫 만남'이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는 속도감 있는 상황 전개가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읽는 재미가 죽여준다.(몰입도 맛이 끝내준다는 말이다.) 보통 350쪽 내외의 책을 읽게 될 때, 나는 책에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유형이다. 간혹 100쪽이 넘어가도 집중이 안 될 때도 있는데(100쪽을 글자만 읽은 셈이다!) <적>은 나처럼 산만한 독자를 단 한 장만으로 집중시켜버린다. 게임 오버!

  <적>이 갖고 있는 반전 구조는 새롭지 않다. 나는 <적>의 반전 구조를 서너 번 이상 영화에서 이미 접해본 독자였으니까. 오히려 식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즐겨 볼 수 있는 스릴러나 심리 드라마 영화에서 빈번하게 다뤄진 반전이 <적>에 있었다는 말이다. <적>의 훌륭함은 그러한 반전이 주는 구조의 힘이 아니라, '내 안의 적'을 섬뜩하게 잘 그려낸 것에 있다고 본다. 나처럼 뒤늦게 <적>을 읽은 독자라면 특히!  '나와 타자와의 관계'라는 주제에서 이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기실 <적>은 그 의미보다는 '내 안의 타자성'을 들춰보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춰진 내 안의 타자 모습, 부정하거나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믿을 정도까지 무마시키"(141면)는 내 안의 타자 모습. 그러한 타자의 모습은 "하느님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30면) 어느 순간 드러나게 되는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 안의 타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적> 에 읽혀지는 타자의 의미만을 국한해서 생각해 보면, 간단히 말해 '폭력성'이 아닐까, 한다. 죄의식이 동반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 살인도 서슴치 않을 수 있는 "폭군의 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은혜로운 독재자 덕에 산다고 믿었지만, 실은 자신의 뱃속에 웅크린 적의에 찬 폭군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32면  
   

그러니까 <적>은 매우 다양한 시리즈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내 안의 타자성"은 '폭력성' 뿐만이 아니니까. 내 안에 감춰진 어둠, 언제나 부정되어 온 심연, 그 심연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자성을 잠재워두고 있는가! "은혜로운 독재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그리고 우리는 "적의에 찬 폭군"을 망각하고 은폐한다.  화장(化粧)할 것!   

   
  중요한 건 첫 죽음뿐입니다. 살인의 경우 죄의식의 여러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그거지요. 죄의식은 누적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 백 명을 죽이는 것이 단 한 명을 죽이는 것보다 결코 더 심각하게 여겨지진 않는다는 얘기죠. 그래서 일단 누군가 한 명을 죽이고 나면 왜 백 명을 죽여서는 안되는지가 모호해지는 겁니다. - 26면  
   

생각되어지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또다른 나,  첫 죽음과의 대면 앞에 내 안의 타자성을 부정한 나, 그러나 '화장법'에 실패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나 "폭군"과 함께 공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가 역시 연착되지만 않는다면!
 

사족 1, <적>을 보면서 느낀 건 확실히 프랑스나 독일쪽 소설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글이 많다는 거다. 단순히 <적>에 장세니즘이니 팡세니 파스칼이니 하는 자기 동네 친구들이 인용되어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던져주는 주제나 상황들이 머리 좀 복잡하게 만든다는 거다. 현학적인 문구로 일반 독자를 기만하지 않고 이렇듯 일상에 녹여 삶과 연결시켜주는 재미와 함께 말이다.

사족 2, 제롬 앙귀스트나 텍스토르 텍셀이나 이들의 이름이 보여주는 어원적인 의미들도 재밌게 봤다. 제롬이 결국 짜여진 시나리오(= 텍스트 짜는 사람)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 불안과 고통을 안고 있는 자라 해도 혹은 또 다르게 의미를 추측할 수 있어도, 단순히 내용 전개에 필요한 설정이었다는 점 외에,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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