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거기서 뭘 하고 있니? 무엇을 보고 있니? 해가 지고 있어요. 개천물이 흐르고 오리들이 놀고 있어요. 바람이 나무에 사무치구요, 해는 둥글고요, 산은 높고 나무들이 있지요. 새들이 날아다녀요. 선생님은 회색옷을 입었구요. 키가 크고요. 땅은 땅빛이구요." p. 140

 
 『새』는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슬그머니 왔다 가버리는 ‘삶’에게 언제나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하지만 어느덧 짧게나마 돌아볼 수 있는 ‘삶’이 내게도 있게 되자, 끝내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던 ‘삶’ 이라는 게 두려워 장롱 속에 숨어 가만히 지켜보게 된다. ‘삶’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을 읽게 되면, 조금씩 그 장롱 문을 열 수 있을 것만 같다.


2.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니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 없어." p. 74


 추레한 차림의 깡마른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온다. 곧장 주류가 들어 있는 냉장고로 가더니 소주 한 병을 꺼내 와서 값을 치르고는 편의점 밖으로 나간다. 그는 문 밖에 서서 병뚜껑을 돌려 단숨에 소주를 마셔버린다. 한낮에 아무 말 없이 소주 한 병을 마셨던 그 사람의 모습이 깨끗하게 비워진 빈병과 무척 닮아 있다.
 

3.

“인생살이가 소꿉놀이 같아. 한바탕 살림 늘어놓고 재미나게 놀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물어오지. 그러면 제각각 놀던 것 그대로 그 자리에 놓아두고 제집으로 가버리는 거야. 사람 한평생이 꼭 그래” - p. 94

 
  제집으로 가버리는 사람 한평생을 아이는 언제쯤 알게 되는 걸까? 내일도 모레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설명 앞에 조그만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는 죽은 이의 몸이 썩어 문드러지고 무덤 위의 풀이 두세 번쯤 색이 바뀌게 될 때까지도 그 사람을 기다린다. 일찍 제집으로 가버린 아이의 삶이 담긴 『새』

 
4. 

"누나. 엄마가 왜 그랬을까. 우릴 발가벗겨 내쫓았었지. 엄마는 늘 울었어. 엄마가 잠자는 동안 엄마 얼굴에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나간 혼이 찾아오지 못한 거야. 누가 엄마 얼굴에 그림을 그렸지?" p. 141

 
 삶의 불가역성. 삶을 알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죽음 앞에 마주서게 될 때다. 그가 살았던 집을 떠나 그가 입었던 옷가지를 불태우고 사진을 불태워도 어느 날 그 사람이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그 사람이 좋아했던 음식을 찾게 되고, 그 사람이 흘렸던 눈물만큼 흘리고 있다. 니 핏줄이 그렇다. 나는 나를 보는 게 무서워졌다. 

 
5.

“아주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사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아름다운 결과 무늬로,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부드럽고 둥글게 닳아지는 돌들, 지난해의 나뭇잎 그 위에 애벌레가 기어간 희미한 자국, 꽃지는 나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그 외로움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바람은 나무에 사무치고 노래는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p. 75

 
 불콰해진 얼굴로, “내 인생 풀어보면 책 10권은 더 낼 수 있을 끼다. 어찌나 한 많은 인생인지 저걸로도 다 풀어놓지 못할 걸? 암, 모지르지.” 그 한 많은 인생 풀어놓기도 전에 늘 취기에 먼저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 그 한 많은 인생 말로라도 다 못 풀고 떠난 이들의 이야기, 절실했던 삶의 순간들,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삶의 순간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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