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배 보살들과 인연 맺은 지도 십오년이 넘었다.

세월이 가면 절을 더 잘하고, 힘은 덜 들 줄 알았는데

나이 생각을 못했다.

이제는 그냥 소풍 삼아 따라 간다.

봄 꽃 보고, 백련암 공양주님들이 해 주시는 맛있는 밥 먹고

열심히 수행하고 사시는 도반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사람의 삶의 풍경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를 보게 된다.

 

절하고 기도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하지만 절하고 기도한 마음의 힘으로

일어난 일에 마음이 끄달리지 않는 여유가 생겨서

나는 절을 한 후로 많이 웃고, 자주 웃고, 더 평온해졌다.

 

만 배 보살들의 원력이 온 나라에 회향되어

어지러운 세상 한 귀퉁이라도

밝음이 가득하면 좋겠다.

삼년 만에 돌아온 세월호의 아이들이

수습되리라는 기대 자체가 헛된 것일 지라도

미수습자들이 남긴 무엇인가가 꼭 가족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란다.

올 사월 삼천배, 우리 모두의 바램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만 배 보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고마워요, 나의 도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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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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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20-03-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고 박경리 님의 글이군요. 유고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책은 저도 읽고 리뷰도 남겼던 것 같아요. 지금 저는 기억찾기 중... 혜덕화 님 고마워요^^
 

인간의 삶이 한조각 구름과 같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감한다.

아침에 목욕을 다녀오면서 아버지 닮은 분을 봤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밀양에 산 전원주택지를 보면서 지난 주 엄마가 말씀하셨다.

"니 아버지 살아계셨음 정말 좋아했을텐데, 이것을 못 보고 가셨구나."

 

삶이 이렇게 무상한 것이구나.

그렇다면 남은 생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버릴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박경리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갈 수 있을까,

아버지처럼 하루도 아픈 날 없이 잘 지내다

가볍게 갈 수 있을까,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어디로 갈 것인지 정도는

알고 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삶이 뜬구름 같고, 하룻밤 비에 지는 벚꽃잎 같아도

삶은 아름답고 감사하다.

이 몸 받고 이런 생을 받아서 감사하다.

아버지 기일이 다가오니,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난다.

팔십 넘어서도 책을 좋아하여, 롯데백화점 서점에 가서 한두시간씩 책을 보고 오셨는데

어느 날 가 보니 롯데에서 책읽는 코너를 없앴다던가, 서서 읽게 자리를 치웠다던가

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쉬워하셨는데

그 때는 귀담아 듣지 않았던 그런 말씀까지도

너무나 그리운 봄 날이다.

아버지, 세월호 떠 올랐어요.

이 소식도 참 기뻐하셨을텐데......

너무너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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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4-09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디서 아버지 비슷한 분을 만나거나 비슷한 억양으로 말씀하시는 분을 마주치는 날은 금방 눈물이 핑 돌아요.
삶이 무상하다는 생각도 너무 자주 말고 아주 가끔만 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혜덕화님, 평안하세요.

혜덕화 2017-04-10 13:25   좋아요 0 | URL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아까운 벚꽃이 마구마구 집니다.
바람이 불어도, 조금 슬퍼도 평온한 나날들입니다.
삶은 무상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가져봅니다.
좋은 일 있을 때마다, ‘아버지 살았으면 참 좋아하셨을텐데‘ 이 마음도
언젠가는 하지 않게 되는 날도 오겠지요.
봄을 아끼며 즐기는 날들 되기 바래요.^^
 

이렇게 떠오를 수 있는 거였구나.
바다 속에 아이들과 함께 수장되어 3년을 견딘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미안하다.
부디 미수습자들이 모두 돌아오기를_ (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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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아이들이 아직도 학교에 남아서 복도를 뛰어 다닌다.

엄마가 올 때까지 방과후를 돌아야 하는 아이들

맞벌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아이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는

학교에 친구들과 남아서 방과후를 하는 것이 낫겠지.

 

아침 8시에 집을 나서서

저녁이 될 때까지 학교, 학원이라는 공간에 남아서

무언가를 배우고 쓰고 암기하고

아이들이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어제 저녁 ebs<나쁜 개는 없다>-제목이 맞는지 모르겠다-에 보니

어린 강아지도 마음껏 뛰어 놀아야

새 주인에게 적응을 잘하고 자존감이 높아진다는데

어릴 때부터 학원만 돌다 집에 가는 아이들에게

자존감이나 행복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우리 자랄 때보다 훨씬 비싼 장난감과 맛있는 음식과 풍요로운 물질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더 까칠하고 이기적이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맞벌이를 생각하면 보육비 지원이 당연하고

더 많은 보육 시설이 만들어져야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엄마가 돈 벌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저녁 5시까지 남아 있는 아이들을 보면

현실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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