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일찍 출근하는 날엔 선암사에 들른다.

한 달 전 쯤 우연히 배가 고픈듯 우는 고양이를 만났다.

가방 안을 뒤져도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그 날 이후로 핸드백에 <천하장사>를 하나 사서 넣어 다녔다.

한 달 가량 그렇게 넣어 다녀도 만날 수가 없어서 , 다른 데로 갔나보다 했는데 지난 주 월요일에 다시 만났다. 그런데 포동포동 살 찐 새끼가 3마리 옆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새끼들은 털도 윤이 나고 활발하게 장난을 치는데, 어미는 뼈만 앙상했다.

반가운 마음에 가방에 든 소시지를 주었더니 아주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도 아쉬운 듯 울어서 마음이 아팠다.

새끼들은 사람을 경계하는 지 아예 옆에 오지도 않는데, 어미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다음날, 소시지를 좀 더 넣어서 선암사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혹시 못만나면 어쩌나 했는데, 어제 먹이 준 자리에 기다린 듯이 있다가 나를 보더니 가까이 오는 것이 아닌가.

 

수요일은 비가 많이와서 못만나고, 어제까지 4번 만났다.

어젠 더 맛있는 거 줄 거라고 치즈가 섞인 햄토리를 사 갔는데, 의외로 처음엔 먹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고양이에게 말했다.

"아줌마는 방학하면 이 시간에 못 와. 그러니 너도 절 주변에서 살려면, 입맛에 맞지 않아도 공양간 음식에 길들어야 해. 공양간의 채식이라도 먹어야지 새끼 키우고 살지."

 

뼈만 앙상한 어미를 보면서, 주름 깊은 부모님과 시어머니와 세상의 모든 부모님을 생각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배고픈 고양이를 먹이면 되지, 거기에 부모의 모습을 연상한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내 생각에 내가 또 걸려 넘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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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2-07-1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안녕하셨나요?
우리집이 길냥이들 무료급식소가 된것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배고파 보이는 어미 고양이 한마리 ^^ 요즘도 사료 한 가마니 사면 금방 없어져요.

혜덕화 2012-07-15 09:19   좋아요 0 | URL
야클님, 반가워요.
아기가 많이 컸죠?
몇살쯤 되었나요?
님의 서재에 가서 정보를 보충해야겠군요.^^
야클님처럼 데려다 키울 용긴 없구요, 가끔씩 티비에 보니 절에서 키우는 고양이도 있더락요.
그 고양이가 절 음식에 적응하길 바란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7-14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선암사...순천 쪽에 사시나요? 고양이가 잘 커야 할텐데요.

혜덕화 2012-07-15 09:22   좋아요 0 | URL
아뇨, 순천 아니고 부산에 당감동에도 선암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어요.
순천 송광사같은 풍취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침에 가면 참 좋아요.
고요하고 깨끗한 마당과 시원한 바람과 단정한 절 풍경.
그러게요.
새끼들 건강한 거 보니까, 어미도 아마 새끼 낳은지 얼마 안되어서 그렇지 곧 회복되겠지요.
인간보다 고양이가 더 예민한 심성을 지녀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리라 믿어요.
나 만나기 이전에도 잘 지내왔듯이...^^

노이에자이트 2012-07-15 13:53   좋아요 0 | URL
아...선암사가 부산에도 있군요.부산이 산이 많아 경치좋은 곳이 꽤 있는 편이죠.

기억의집 2012-07-14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고파서 음식쓰레기통 뒤지는 길고양이가 불쌍해서 집에서 먹던 음식 주다가 매일 그 시간이면 저를 기다리는 모습 때문에 이젠 고양이 사료 사다 놓고 갔다주게 되었어요.
야클님 말씀대로 고양이 사료 사면 금방 없어지긴 하지만, 한번 시작하니 끊기가 뭐 하더라구요. 혜덕화님도 아마 눈에 아른아른 거리실 거에요. 오늘은 비가 와서 몇번을 왔다갔다했는데, 오지 않았더라구요. 배고플텐데....어디서 뭐하는지^^

혜덕화 2012-07-15 09:25   좋아요 0 | URL
고양이 사료도 있나봐요.
저는 개도 고양이도 키워보지 않아서 개만 사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야클님도 기억의 집 님도 저보다 한 수 위의 보살님들이시네요.^^
오늘 마트 가면 고양이 사료를 사야겠어요.
비 오면 안보이더군요.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아요.

hnine 2012-07-14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혜덕화님의 이 페이퍼 읽고서 오늘 남편에게 이 얘기 해주면서 저녁 먹었네요.
'측은지심' 얘기도 했고요.

혜덕화 2012-07-15 09:31   좋아요 0 | URL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도 우리를 측으지심으로 키우셨겠지요.
저는 요즘 그 고양이를 보면서 지장전에 들를 때마다 온 세상의 부모라는 위치에 있는 모든 유정, 무정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어제도 엄마께서 손가락에 마비가 온다고 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MRI를 찍어보자고 해서 찍었다고 하더군요.
그 말 듣고 마음이 짠했습니다.
워낙 부지런한 분이라 별일은 아니겠지만,누구나 늙고 병드는 무상을 피할 수는 없지만 우리 부모님은 건강하셨으면 하는 집착은 내려놓아지지 않는군요.^^

프레이야 2012-07-15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좋은 일 하시네요. 저는 길냥이들에게 먹이를 줘본 적이 없어요.
제 사는 주변에선 보이지도 않구요.ㅠ
당감동 선암사는 꼭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올해 2월인가 그랬는데
참 좋더라구요. 천천히 한 바퀴 걸었더랬어요. 불자는 아니지만 가끔 절에 가곤해요.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요. 이기적인 방문이지요.^^

혜덕화 2012-07-15 20:18   좋아요 0 | URL
좋은 일은 님과 야클님과 기억의 집 님이 하고 계시구요, 저는 그냥 가끔 마주치는 고양이 먹이를 몇 번 주었을 뿐이예요.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꼭 절이 아니라도 산이나 나무가 많은 곳에 가면 마음오 고요해지는 이유가 있더라구요.
나무나 산, 물, 바위는 우리처럼 바글바글 끓이고 살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주는 에너지가 우리를 치유하는 거라고.
님도 배고픈 길냥이를 만났더라면, 먹이를 주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책읽어 주는 몸보시가 정말 어려운 거잖아요.^^

라로 2012-07-1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고양이 이야기가 이렇게 큰 가르침을 주다니요!!
저는 님의 마지막에 쓰신 글을 읽고 망치로 한 대 얻어맏은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한동안 뜸하셨지만 혜덕화님의 일상은 늘 정진하는 나날이군요~.^^
건강하신것 같아 기쁩니다.^^

혜덕화 2012-07-15 20:23   좋아요 0 | URL
서재 브리핑에 뜬 님의 글을 읽었어요.
이름이 바뀌어서 누구신가 했거든요.
여전히 바쁘게, 소녀처럼 살고 계시더군요.
내가 지은 생각에 내가 걸려 넘어지는 일.
꼭 그 순간 알아차리지 못하고 뒤늦게 알아차린답니다.
정진까지는 아니고, 사이비불자로라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중이예요.^^

BRINY 2012-07-1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기르던 생쥐(얼룩무늬 마우스)가 그 작은 몸으로 4마리 아가들 먹여살리고는 기운이 빠져서 일찍 세상을 떠났던 생각이 나네요. 어느 정도 큰 아가들 4마리가 한번에 젖달라 몰려들면 엄마 몸이 들릴 정도였는데 전혀 불평 안하고 엄마 노릇 잘하다 자식들만 키워놓고 일찍 갔어요. 저도 눈물 나네요.

혜덕화 2012-07-16 15:49   좋아요 0 | URL
세상에 신이 대신 보낸 사람이 어머니라고 하잖아요.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좋은 부모인 것 같지는 안지만
우리 부모님 생각하면 참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고양이든, 생쥐든, 사람이든
제 목숨 내어줄 수 있는 대상은 '새끼'인 가봐요.
부모님께 받은 거 자식에게 갚고 산다고들 하지만, 제대로 갚으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