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전쟁은 없다 

'무의식의 저널' 시리즈는 사실 <법은 아무 것도 모른다>를 통해 접한 적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완전한 상태'를 향한 욕망을 파헤치고자 한다.

어쨋든 이 철지난(2004년 산이다) 논문들의 집합이 지금-여기 우리에게 갖는 '여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반세기 동안이나 '휴전국'으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물음일 것이다. 왜 '전쟁'이란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이 책이 넌지시 제기하는 '물음들'을 살펴보고 있자면, 반전주의자는 동시에 열정적 전쟁지상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신이 '작동'하는 자동기계적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2. 문자와 국가 

아, 정말 모종의 페티시적 욕망이 불타오르는 '컬렉션'이라 할 만하다. 아직 고진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필자이기에, <트랜스크리틱>의 이해는 언제나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진만큼 쉽게 '읽히는' 사상가도 드물지만, 그만큼 오독의 여지와 진정한 '독해'의 어려움을 동시에 담보해야만 하는 사상가 또한 드물다. 

<문자와 국가>라는 강연집에서의 여러 초기 작업들은, 그의 정치철학에 대한 입문서 격의 저서 - <세계 공화국으로>, <트랜스크리틱>(은 좀 어렵지만) - 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준다. 더불어 '문학평론가'로서의 고진과 데리다의 문자론(그라마톨로지)와 비교되는 그만의 '문자론'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쨋든 '언어' 혹은 '문자라는 이름'이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문젯거리'가 됨은 분명한 듯. 

  

 

 

3.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독일 낭만주의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분석서라고 할 만하다. '프레드릭 바이저'라는 이름은 비록 꽤 낯선 이름이긴 하지만, 그가 작업하고 있는 초기 독일낭만주의와 독일관념론에 대한 연구는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브레히트처럼 '낯설게' 보지만 않는다면.) 다만 낭만주의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 어떤 '보수성', 그리고 중세적 세계관이라는 점을 감안할때, 이 저서가 초기 낭만주의에 대해 밝혀내는 '급진적' 제스쳐의 발견이란, 놀라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쌍 슐레겔(프리드리히, 빌헬름), 셸링, 노발리스 등의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가진 '시'적 개념은, 충분히 철학적/윤리적/정치적으로 확장 가능한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명령은 결코 유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의 범주를 넘어, 비판정신을 토대로 한 '계몽에 대한 계몽'으로 나아간다. 

 

 

4. 언어의 감옥에서 

이 평론집의 목차를 보면서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특히 1부 '식민주의와 언어' 부분은 제목만으로 충분히 필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비록 직접 읽어봐야 하겠지만) 보론격의 2부 또한 흥미가 간다. 사실 그저 '흥미가 간다' 라고 표현하기엔 좀 씁쓸한 감정이 밀려오기는 하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그의 글이 과연 어떤 '굴곡'을 보여줄지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은 사실이다. 

'내셔널리즘'에 대한 분석이 이 책의 '골자'라 할 만하고, 그가 "모어의 폭력성"이라고 부른 언어의 '감옥'에 대한 저항적 고찰이 과연 얼마나 구조주의적 한계를 잘 극복해내면서 개인과 주체,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조건들'로 사유될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5. 성혁명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의 결합. 그것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정신분석'이 가지는 쌍방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의 '욕망' 그 자체이다. 마이너한 사회사상가가 역사 속에서 전유하는 스탠스가 늘 그러하듯, 저자인 빌헬름 라이히 또한 시대 속에서 함몰되지 않은, 시대를 항상 '뛰어넘는' 주체들과 조우한다.  

'성교육'이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그것은 왜 국가적 교육의 '대상'이어야 하는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교육의 '자율적이며 주체적인' 경험이다. 더불어 그것은 가족제와 가부장제에 대한 '복종'으로부터의 탈피, 그리고 나아가 '집단'이라는 이름속에 묻힌 개인을 해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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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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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억 하나.   

어쨋든 나는 그의 평전을 추천하면서, 지난 군시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그 시절 내가 <죄와 벌>에 대한 '독서'를 경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 도스또예프스키를 '읽는다는 것' - 은 내게 세계가 가지는 어떤 초월적 감정들을 분해하고, 해체시켜, 나의 과거 속에서 재조립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그를 생각하는 것이, 나 자신의 어떤 '고착상태',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한 돌파구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철학', 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굉장히 생소하게 들려온다. 만약 이 단어가 우리에게 풍기는 향기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꽤 다양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안락함과 젖과 꿀이 흐르는 그런 풍요로움을 상징하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재미있게도, 나는 군생활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일련의 독서를 통해서 이 '불편한 이름'을 획득했다. 아니, 그것은 반대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시간을 빌어 또한 고백하건데, 그 이전에 나는 결코 철학을 '한다'라는, 불편하고 동시에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의 문장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비교적 장황한 설명이 뒤이어져야만 하나, 그것은 어쩌면 너무 편협한 개인의 일대기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다만 내가 지금 이렇게 뜬금없이 '철학' 운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죄와 벌>이 가져다준 무한한 충격,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게서 받은 어떤 지난한 영감, 또한 그를 추억하면서 얻게 되는 모종의 '분석적 함의'로 인해 내가 비로소 철학이라는 의미를 '실천praxis'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쨋든 그는 결코 철학자가 아니다.(저자인 카 또한 왠일인지 이 사실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요지는, 그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해 여름, 한창 유행하던 신종플루로 '격리'된 채 천막에서 소일하며 <죄와 벌>을 집어든 것은 결코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동시에 결코 타인을 '향해'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오롯이 내 자신의 내부에서, 그 언저리의 작은 모퉁이에서 조용히, 그리고 그 자폐된 공간을 맘껏 향유하면서 (마치 내가 로쟈가 되어버린 듯이)그 책을 읽어내려갔다. 이후 나는 한 편의 글을 적었다.(그 글을 적은 '공간'은 지금 사라졌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 글이 내 최초의 '실천'이었다고 생각한다. 내부에서 이루어진 독서는, 반대로 글쓰기를 통해 외부로의 '확장'을 (내부로부터)이루어낸다. 나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현재의 자신을 맘껏 조롱하며, 비웃으며, 또한 그러한 자신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폭로'를 통해 비로소 철학적 '시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건 꽤 시원섭섭한 경험이었다. <죄와 벌>이 가져다준 하나의 (관념적)쓰나미가 나라는 매개를 통해 타자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었던 최초의 경험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하이데거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읽으며 느꼈던 모종의 '이물감', 그리고 이후 니체를 읽으며 느꼈던 '모호함', 칸트와 헤겔의 겉핥기를 통해 느낀 '견고함', 마르쿠제를 신봉하면서 생각했던 '나태함', 벤야민을 통해 느낀 자신의 '비겁함', 프로이트를 즐기면서 느꼈던 '억압감', 그리고 이후에 알게 된 수많은 현대 (정치)철학자들과 그들이 보여주(었)던 '충격들'을, 나는 결코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나 자신이 처음으로 '인식'했던, 그 이전에는 경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하나의 '이론적 실천'이었다. 

 

비범, 혹은 평범. 그리고 이중성 혹은 결여

그의 인생을 비범하다 말할 수 있을까.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니니, 대신 비범하다고 해두자. 대체로 '평전'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그의 평전을 새로이 읽게되는 것은 그의 작품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을 그의 삶 속에 투영시켜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선, 저자의 생각에 따라(때로는 반대하며) 흘러가는 그의 여정이,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하나의 시처럼 다가왔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결실'을 맺어가는 과일나무의 형상을 보는 것처럼 우리들로 하여금 '고난과 역경', - 러시아가(혹은 러시안이) 가진 어떤 근원적 아픔을 포함한 - 그것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형성시킨다. 그의 작품이, 다만 현재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의 '해석틀'이 되는 이유는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의 '세계관'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비범한(위대한)' 누군가의 실천이란, 그래서 결코 특별하지는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건 우리들이 생각하는 '평범함' 속에서 비로소 잉태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이제야 느꼈지만 '그'라고 줄여쓰고 있었구나..) '정체성'이란, 그 모든 이력 속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용광로에서 나온 하나의 '철재(작품)', 그리고 그 철재가 다양하게 사용될(해석될), 여러 분야의(예컨대 철로라던지, 건축물의 철골이라던지) '타자성' 속에서 비로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처럼 다양한 분석과 비평의 잣대를 가진 작품이 이전에 존재했던가?

"옴스끄 감옥에서의 4년간 도스또예프스키는 인간 사회의 보통의 인습과 규약에서 벗어난, 거의 인간 이하의 생존에 다다른 사람들과 생활했다. 그는 지리멸렬한 인간 열정의 있는 그대로의 요소들이 끓어오르는 심연을 응시했고, 그 심연은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왔다." p.83 

니체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선악의 저편(선악을 넘어서)>이 <죄와 벌>과 갖는 연관성이란, 마치 프로이트가 라캉에게 갖는 그것만큼이나 주요한 '누빔점'을 갖는다. 사실 '동시대인'으로서, 그들이 얼마만큼의 정서적 교류를 경험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 속에는 어떤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은, 그 '응시'속에서 그 이외의 단 한사람, 바로 '니체'라는 하나의 '철학적 토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의 문제, 더불어 이러한 윤리적 작인으로부터 파생되는 '죄의식'의 문제는 결코 현대인의 '권리'의 문제와도 동떨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더 확대-재생산되어, 그리고 라캉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우리들에게 한층 더 가속화된 죄의식을 경험하게 해준다. 물론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은 이러한 '억압'을 부정한다.(그들은 오히려 이러한 모든 억압된 죄의식들에 대해 분자화된 '혁명'을 추구한다.) 이렇게 로쟈로부터 파생되는 일련의 윤리적 '문제제기'는, <백치>를 통해 형이상학적 구체성을 향해 나아가며 <악령>을 통해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포획한다.  

".. 모든 현상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연역되야 한다면, 또한 모든 현실이 에고로부터 추출되는 것이라면 행위의 외적 기준 혹은 제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최상의 의무는 자기 자아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 그리고 최상의 사명은 자기 개성의 발전과 성취가 아닐까? 라스꼴리니꼬프의 동기는 스스로가 초인임을 입증하고 도덕적 관습을 뛰어넘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p.232 

결국 이러한 '권리', 즉 주체가 가진 윤리적 '이율배반'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의 '이후' 작품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테제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단지 헤겔을 참조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온전히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판단한다. 예컨대 그가 내비치고 있는 죄의식의 '주체'는 확실히 유물론적이다.  

"... 그것은 아마도 죄에 있어서의 공산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바, 이것은 <악령>의 마지막 부분의 한 줄에 처음 나타나 그의 후기 작 전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는 자기 임종에 앞선 확각의 순간에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죄를 졌다"고 말한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조시마는 죽어 가는 형으로부터 "모두가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일에 죄를 졌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것은 어쩌면 속죄의 신학적 이론을 수학할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이론일 것이다.." p.351 

그는 단호하고 선언적인 태도로, '모든 죄의식의 주체'가 다름 아닌, '모두'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확실히 신학적인 언표로 들린다. 하지만 더불어 그것은 하나의 토대, 그러니까 죄의식이 가지는 일종의 하부구조를 담지한다. <이>로서 살아갈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침묵할 수 없는' 하나의 물음이다. 단순히 이러한 죄의식의 '주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죄의식 자체의 '전全책임성'을 인정하고 하나의 '권리'를 재-탄생시킬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죄의식을 '모두' 해체하고만 있을 것인가? 

나의 경우엔, 모든 '해체의 작업'은 해체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필연성의 구조 내부에 잠식하는, '우연성'이라 불릴 만하다. 죄의식이 가지는 모종의 '권리'의 해체에 대한 모든 시도는 어떤 필연적 우연에 의해 해체되는 것일지도. 다만 그러한 작업이 잉태하는, 나머지로서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미성년>에서 그가 보여주는 비형식성, 그리고 주인공의 심리적 혼돈과 분열의 제 과정이야말로, 그러한 후기 작품에서 그가 주요 쟁점으로 생각하는 이중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저자인 카는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미성년>을 하나의 '위대한 실패'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어쨋든 또다시 모든 귀결은 이것이다. "인간 본연의 윤리, 그 무의식의 심연을 오롯이 장식하고 있는 바로 그 테제의 분열과 안티테제의 도전을 허용하는 모든 '죄의식'의 권리가 만들어내는 복합물로서의 '해체'의 잔여물이란, 과연 어떤 경로로서 이러한 '결여'의 공백을 대체하는 '이중적 욕구'를 만들어내는가?" 

그러므로 내게 만약 그의 평전을 읽고난 뒤에 남은 단 하나의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 '무엇' 때문에 당신은 <범인凡人>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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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대칭 - 자연의 패턴 속으로 떠나는 여행 승산의 대칭 시리즈 4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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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선 이 책을 읽고난 후의 작은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 책을 직접적으로 '수학'이라는 과목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적극 권하고자 한다. 게다가 - 이건 확실히 수능세대의 폐해라고 생각되지만 - 이 책의 몇몇 부분은 수능 수학에도 충분히 '응용' 가능한 내용들이므로(실제로 수능을 본지 까마득한 필자는 '경우의 수' 부분으로 몇몇 문제를 생각해보기까지 했다! "이 도형의 (모든 종류의)대칭의 개수는 몇 개인지 답하시오?!")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획일적인 '응용 문제'를 줄줄 풀어야만 하는 '수능 수학'에서 이러한 '대칭'과 군론, 새로운 수학적 '공식'들이 어떤 실용성을 가질 지는 좀 의문이 들기는 한다. 다만, 이 책이 한 수학자의 집념어린 '대칭적 삶'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또한 '알기 쉬운 000' 시리즈처럼 수학 자체에 대한 부드러운 입문서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수학이라는 학문을 다루는 우리들의 '자세'와도 관련되어 있다. 어떤 '학문'적 접근이 그러하지 않겠는가만은, 사토이의 '수학적 삶'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신앙적인 자세가 엿보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수학적 '신'이란, 오직 '자연' 속에서 존재한다. 그것도 '다의적'으로 말이다. 이건, 왠지 스피노자가 생각날 법도 한데, 여튼 굳이 철학적 난센스가 아니더라도, 그의 학문적 태도는 충분히 본받을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삶 자체가 '학문'이며, '자연' 속에서 수많은 학문적 아이디어를 소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부럽기까지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약간 여담이지만, 책에서 나오는 '몬스터 대칭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존 콘웨이'를 비롯한 <유한군의 아틀라스> 저자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선, 꽤 흥미로운 하나의 '게임'을 발견했는데, 콘웨이가 만들었다는 '인생 게임(혹은 생존게임. The game of life)'이 그것이다.   

 

(다음 사이트에 가면 설명과 함께 플레이가 가능하다. http://math.com/students/wonders/life/life.html

이 저서의 내용처럼, 이 게임에는 몇 가지의 '법칙'이 존재한다.(자연에 존재하는 (유한한)대칭물의 그것처럼!) 하나의 '세포'는 좌우 혹은 상하의 세포 존재의 영향을 받으며, 그에 따라 삶 혹은 죽음을 부여받는다. 그들은 여러 법칙들에 따라 '변화'하며, 각각이 가지는 '패턴'을 만들어낸다. 자신만의 '패턴'을 만들고 싶은 이라면, 한번쯤 플레이 해보시길- (그런데, 정작 콘웨이의 저서가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약간 유감이다. <몬스터 대칭군을 찾아서>라는 저서가 유사한 내용인 것 같지만.)

더불어, 초등학교 시절 '아이큐 검사'랍시고, 이런 '대칭'에 관한 문제들이나 도형의 (예측가능한) 변화의 모습을 푸는 문제들을 경험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나에겐, 이런 문제들이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었다.(그래서 아이큐가 낮게 나온걸까?) 사칙연산과 공식 외우기에 급급했던, 그리고 '눈높은(?) 수학' 숙제에 파묻혀 매일 매일 자신을 '주산기'로 만들어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더불어 초등학교에서 잠시 보조교사 활동을 하는 지금도, 필자는 아이들이 푸는 '계산기' 문제들을 보며 과연 한국의 '수학교육'이란, 그들을 모두 계산기가 필요없는 공돌이로 만드려는(정작 공대에선 계산기만 쓰지만) 누군가의 술책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밀려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에게, (비록 그 아들은 부담스러워 하는 듯 하지만) 다정하게 세계 속에 파묻혀진 수학적 알레고리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사토이의 모습이 새삼 바람직하게 느껴진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자면, 필자가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은 '보르헤스 문학'의 수학성이다. '광폭한, 그리고 셀 수 없는(동물)'이라는 챕터를 통해, 어쩌면 필자는 보르헤스를 다시금 재-독해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바디우가 수학의 집합론을 철학에 들이대면서, 필자로 하여금 일종의 '아나키'한 혼돈의 상태를 경험하게 만들었다면, 보르헤스는 문학의 형식을 통해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이라는 장르를 결합시킨 장본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건축에 나타난 수학적 양식들을 고려하며,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하시금 재고할 수 있었던 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전공자가 아닌 입장이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느꼈던 것은 '아젠다 설정'의 문제(즉 세계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의 자기-설정),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그러니까 '현존에 대한 희구'에 관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학자의 '1년'이란, 사실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간의 연장선상 속에서는, 언제나 세계의 하부구조(물질적 '현상')의 근본-이해에 관한 무의식적 욕망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비단 수학자의 모습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우리들 자신이 진정으로 '세계'라는 '대타자'를 이해하는 상징적 행위의 연결고리 속에서는, 다분히 그러한 욕망의 행위가 내포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세계와 개인의 분절적 대칭에 관한)'196,886차원의 욕망'이라 할 것인가? 필자는 잘 모르겠다.(4차원 이상 생각하면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다만, '진리'를 향한 모든 실천의 길에는, 단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 삶 전체를 연소시키는 수학자들의 '시간(이라는 차원)'도 '존재'한다는 것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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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이 책이 어렵다...는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읽혀도 꽤나 재미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적어도 고등학교 수학교과서보다는 재밌어 할 겁니다.^^) 소개해주신 게임도 재밌어 보이는데요. 자신만의 패턴을 만들기라..한 때 유행했던 '스포어'같은 게임인 것도 같구요..해보고 싶지만, 방금 <대칭>을 다 읽은 지금보다는, 조금 있다가 하는 것이 좋겠지요.;;

rainmaker_1201 2011-04-01 01:32   좋아요 0 | URL
게임은 한 번 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왠지 굳은 머리가 팽팽 도는 느낌이 들어서요.ㅋㅋ 이 책을 보고 나면 한가지 의문이 드는데, 과연 이 책이 어려운 건가, 아니면 저 자신이 '수학'을 못하는 건가 하는 것이 그거죠.ㅋㅋ 국가적 교육의 변화란게, 참 힘든 건가 봅니다.
 
인문/사회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어느덧 마지막 추천도서 페이퍼를 작성하고 있네요. 그동안 잘 해나갔는지는 의문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과 생각을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점은 좀 아쉬움으로 남네요. 혹시 다시 활동하게 된다면, 좀 더 많은 생각의 공유와 토론, 그리고 무엇보다 갈등의 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 다들 수고하셨어요.

   

 1.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이 책을 아직 직,간접적으로 접해보지 않은 분들이 있을까 만은, 그래도 필자처럼  '아직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추천한다. 인디언들이 어떻게 그들의 터전을 잃었는지, 그리고 서구인들의 '수탈'이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가장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책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개정판이라는 장점은 보너쓰!

 

 

  

 

 

2. 콘크리트 유토피아 

 : 이 책의 저자는 '디자인 연구자'이다. 단순히 '디자이너'와의 차이점이라면, 디자인이라는 대상에 대해 '인문학적' 혹은 다양한 '영역'을 통한 분석의 틀을 조형시키는 작업을 한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저자가 주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가장 보편적 주거형태인 '아파트'이다. 다만 이것은 일종의 '다각적 사회연구 보고서'이되, 문학적 옷을 입는다. 전세 대란과 부동산 침체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주거에 대해 어떻게 '사유해나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왜 사유해야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지도 모르겠다. 추천!

 

 

  

  

3.  혼종문화

  

: 현재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담론'들을 헤집어보면, 그 내부는 대부분을 '서구 사상가'에게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과연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더불어 우리는 '근대(modern)'라는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 라틴아메리카라는 '주변부'를 생각하는것을 너무나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문화연구의 의미를 벗어나, 이 책이 우리에게 '자각'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내부의 '식민성'일 것이다.

 

 

 

4. 신화와 현실 

 

: 저자인 '마르치아 일리아데'는 사실 <성과 속>이나 융 연구가로도 유명하다. 종교학자로서의 그의 작업은 아마도 수많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저서에서 주요할 점은, 결국 우리들이 자신의 현실 속 '환상의 내부',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일종의 주체론과도 연결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는 결코 하나의 환상(신화)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라는 (초월적)선언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들린다. 

 

 

 

  

5. 전중과 전후 사이 : 1936-1957 

 :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인데, 필자는 아직 그의 '멋진' 글들을 거의 읽어본 적이 없다. 국내에서 영향력 있는 일본 사상가들은 아마도 '가라타니 고진', '아즈마 히로키', '마쓰모토 하지메(?!)' 등이겠지만, 조금 눈을 돌려본다면 그의 이름이 일본 사회에서 꽤 '묵직한'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책은 일본이 패망을 겪은 그 '지점' 바로 이전과 이후, 그 시기에 쓰여진 그의 글을 담고 있다. 한 명의 '젊은 정치학자'로서의 그의 글을 마음껏 엿볼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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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3-1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루야마 마사오의 <전중과 전후사이 1936-1957>이라는 책은 저도 추천할까 말까 하는 책입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책을 찾아보다가, <현대 일본 사상>, <근대 일본의 비평 1868-1989> 같은 책을 토막토막 보며 일본 사상가들의 글에 관심이 조금 생겼는데요.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 기간에, 그리고 패망을 바라보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흥미롭기도 하고, (식민지를 겪었던 우리의 시각에서는) 조금 새롭기도 하더군요('천황'이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구요). 어려워보여서 좀 걱정은 되지만요.^^;

rainmaker_1201 2011-03-13 22:18   좋아요 0 | URL
아, <근대 일본의 비평 1868-1989> 같은 경우는 저도 어서 읽어보고픈 책입니다. '비평'이라는 이름을 단 대부분의 산문이 그러하듯, 물론 어느 정도의 개념을 요구하는 글이라는 생각은 들어요.ㅎ 개인적으로는 가라타니와 아사다(아키라)에 대한 관심 때문에 보고싶은 것이긴 합니다만, '하스미 시게히코'가 푸코와 들뢰즈를 일본에 소개한 대표인물이라는건 처음 알게 되어서, 저도 관심이 가네요.^^

굿바이 2011-03-1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콘크리트 유토피아> 와 <혼종문화> 모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들인데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전중과 전후 사이>는 저도 추천할까 고민을 했었는데, 과감하게 포기했습니다. 사전지식이 너무 없다보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

rainmaker_1201 2011-03-16 19:01   좋아요 0 | URL
저도 사전지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ㅎ 그래도 언제나 '지르는' 입장에서 대부분의 책들을 추천하고는 하지요. 근데 의외로 <혼종문화>를 추천하시는 분이 제법 있어서 약간 놀라고 있습니다 ㅋㅋ
 
<반자본발전사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다른 면에서 조금 '특별하게는', 필자에게 꽤 유용한 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비록 이런저런 개인사로 인해 허겁지겁 읽어내려 가느라 오독하거나 놓친 부분들도 상당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저자들의 생각은 단순히 '자본주의'와 '발전'에 대해 필자가 생각했던 일부의 생각들이, 그저 단순한 '현상인식'에서 비롯된, 모자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곤 했으니 말이다.  

어쨋든 '발전=변화(혹은 진보)'라는 공식에 있어, 우리는 이 동치된 관계 속에서 '='라는 기호에 대해 다시한 번, 우리들의 생각을 '빗금치는' 작업이 필요한 때는 아닌가?  

"발전은 현실을 담아내는 인식이고, 사회를 달래는 신화이고, 욕망을 풀어놓는 환상이"(p.24)라는 작스의 말처럼, 그것은 결국 우리들 사회를 바라보는 모든 '기능주의적' 관점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부풀어오른 자의식처럼 '눈에 띄는' 현상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깃털처럼, 천천히 '부유하고', 또 '가라앉는다.'  또한 그것은 발전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삐딱하게' 재구성하는 것과 관련된다. 왜냐고? 이미 그 대상(발전이라는 관념)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외상적 (관념을 바라보는)왜상'과 관련된다. 지난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발전이라는 하나의 '증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은 이미 '외상적'이며, 따라서 그것이 어떤 '실재적 형상'을 띄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색안경'을 거두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발전'이라는 제목의 3D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에서 '3D용 안경'을 제거하라는 의미다. 그럼 스크린에선, 하나의 '왜상'이 펼쳐지지 않는가? 실재를 마주하는 것, 지젝(라캉)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사막을 마주하는 일'이나 다름없는지도.

"생태 관료주의가 떠오르면 사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가 같은, 사회 윤리를 둘러싼 근본적 논의가 묻힌다. 그리고 서구인의 욕망이 서구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암묵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며 생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고 낮은 수준의 상품 거래를 일부러 선호하는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p.93 

이러한 문구들은, 마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경험하게되는 순간과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쨋든 이러한 말은 자본주의 내부의 '맑스적 유령'을 확실히 현시하는 듯한데, '생태 관료주의'라는 저 오만한 개념에 대항한 '근본적 논의'란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빈곤층의 가난은 부유층의 풍요를 만들고, 빈곤층의 굴욕은 자부심을 낳고, 빈곤층의 의존성은 부유층의 자립성을 낳는다. 따라잡기를 통한 평등은 현실의 불평등을 조직하고 합리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p.121 

'선험적' 불평등(세계경제구조는 불평등을 만들어내며, 그러한 불평등을 동력으로 구조화된다는 것)이란, 결국 이러한 세계적 '이율배반'과 관련된다. 물론 그것은 경제적 모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 하나의 '신화'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과도 겹쳐지듯, 이것은 '세계사회'를 움직이는 하나의 집단-무의식적 연료이다. 트루먼이 남/북반구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누는 연설을 내뱉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 순간, 소위 '저개발 국가'들은 '미국'이라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산 증인은 바로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과 박정희는 아닌가? 또한 결국 트루먼이 말한 '낡은 제국주의'를 대신할 대체물이란, 하나의 새로운 '문화-경제적 파시즘'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계획이라는 개념은 마음먹은 대로 사회 변화를 설계하고 주도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는 계획수립을 통해 진보의 길을 따라 그런대로 순탄하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언제나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로 여겨졌다. 그것은 굳이 발전 전문가가 나서서 애써 설득할 필요조차 없는 공리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p.283

여기서 저자는 푸코의 '생태 정치'를 언급하며 권력이 모든 복지를 장악하고 자료화하는 동시에 사회 자체를 '제어하는' 모습을 통해 현실적 사례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개발도상국이 하나의 '계획'을 통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하나의 공리로 인식되며, 따라서 어떤 '비판의 대상'도 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공리적 인식, 즉 선험된 '계획'이야말로 국가권력이 잘 유지,보수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좀비PC와 같은 것은 아닌지.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 설계를 거부한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에 새로운 대서사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드러내지만, 사회적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해서 말한 것은 마르크스의 유산에 근본적 약점을 남겼다." p.506 

저자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계속 사용하거나, '사회주의식 발전'에 대한 '변종적 추구'를 할 경우, 일종의 마르크스에 대한 '오독'을 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역사적 오해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국 이것은 현대의 탈근대적 이론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비판'이라 할 만한데(혹은 기표의 용법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결국 소련식 사회주의의 한계나 자본주의적 기만에 대항하는 것은 이러한 '오해'의 가능성을 절멸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명확성과 더불어, 일종의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결론과도 관련된다. 

제법 허덕거리면서 읽긴 했지만, 어쨋든 19개의 다양한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들의 목소리는 공통성을 갖고 있는듯 보인다. 그것은 앞서도 설명했듯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주체의 외상적 왜상을 '발견'해내는 일이며, 동시에 발전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즉자적인 발전, 즉 '발전적'인 발전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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