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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1. 어떤 동음이의어  

 대부분의 필자 세대(20대)가 그렇듯이, 우리는 대부분 '그들'을 잊고 지낸다. 책을 읽으며 그들의 이름을 듣고서는, 새삼 끓어오르는 피를 느끼고, 그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신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사실 '그들' 이라는 대명사에는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 단어의 껍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필자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고, 새삼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신해 비난과 조소, 그리고 무엇보다 '증오'를 표출하고 싶게끔 만드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한 '그들'에 대한 감상은, 필자로 하여금 다시금 '지금-여기'에 대한 반추, 그리고 현-존재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현시적 물음을 다시금 담지하게 만든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그들'은, '독립' 혹은 '투쟁' 그리고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위해 스러져 간 모든 이들을 뜻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이 파란만장한 역사의 순간에서 단순한 '욕동' 만을 좆은 비루한 인간군상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러한 동음이의적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어떤 모종의 '기시감'이 존재한다. '그들'에 대한 사유는, 동시에 우리들에 대한 사유이며, 따라서 그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재해석'과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것은 끝없이 '반복-재생'되는 우리들의 지난한 정치적 혹은 존재적 '무력감'을 다시금 깊숙한 역사의 현장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리영희라는 하나의 '기표'를 읽어내려가는, 혹은 사유해나가는 작업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기표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 우리들이 단순히 리영희라는 '사상의 은사'를 박제시킨 사상적 '유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유물이란, 사실 결코 '평전'이라는 바이오그래피 안에 박제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기 이곳, 한국의 정치적 현실이라는 하나의 구체적 '투쟁'의 장소 속에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사상-현실적 '표본'들은, 결국 우리들의 정치적 투쟁, 혹은 갈등의 첨예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해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그의 업적에 대한 수단화나 찬양 따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2. 리영희의 재구성 

그의 평전에는 수많은 이들이 나오고, 사라(스러)진다. 그것은 그의 생애가 다름 아닌 한국의 생애와 함께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의 투쟁이, 그 속에서 하나의 진정성을 만들어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의 투쟁은, '지식인'이라는 탈을 쓴 사회적 동물의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은 데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해서 그들이 다 지식인이 되고 교수가 되어 지적/사상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나가는 것으로 사회가 변화하는 양과 속도에 비해서 신문에 논평하나 쓰면 훨씬 더 효과가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p.264 

그리고 바로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의 태도 혹은 위치(stance)가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물론, 바리케이트 옆에 서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언론'이라는 '비상구'를 통한 그의 활동이, 다름 아닌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도의적 책임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고, 동시에 현실의 기만적 통치(이승만 ~ 박정희 ~ 로 이어지는)에 대해 그가 가진 유일한 '정치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정치적 투사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고 소회하고 있고, 필자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이른바 '현실참여' 혹은 '영향력'에 있어서 그가 이룬 작업들에 대해서는 그 '정치성'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만 그가 언론사와 대학 교수를 넘나들며(그리고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글쓰기'라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현실를 재구성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 즉 한 명의 '저자'로서의 우리들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정초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만, 그의 말 속에서 지식인의 '생산'과 글쓰기의 '생산', 그 영향력 사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이며 시차적인 간극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2011년의 정치적 현실 - 민주주의는 개나 줘버려, 하고 살아가는 - 에 '끼여있는' 세대론의 '주인공'이자, 실존적 '엑스트라'인 우리들 자신의 글쓰기를, 사회적 영향력의 도구, 그리고 무엇보다 '생산력'을 통한 '저자'로서의 글쓰기로 바꾸어 나가자는 고민으로 치환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리영희 자신에 대한 '음미', 혹은 미학적인 '감상'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칼날 서린' 비평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논조'는 지나치게 찬양에 가깝다.) 그러한 비평을 통해서만이, 그에 대한 현재적 '재구성'의 작업이란 가능하게 작용할 것이다.

더불어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주체적 의미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요컨대 리영희라는 기표에게 있어, 혹은 그것을 사유함에 있어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현재적 필요성은, 들뢰즈가 말한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화'와 관련된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리영희라는 비판적 글쓰기의 노동-기계를, 그의 역사적 스탠스 혹은 점유 상태로부터 '탈영토화' 하여, 우리의 '기만적' 현실에 대한 일종의 유토피아적 '지식인상'으로 '재영토화'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우스갯소리지만, 동시에 단순히 그것으로만 끝나지는 않는 음험함을 지니지 않을까, 싶다. 

3.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나? 

글쎄. 필자는 잘 모르겠다. 새는 물론 생물학적으로 날개가 두 개(그러니까 좌우에) 있어야 날 수 있다. 하지만, 새들은 동시에 날기에 적합한 '물리학적, 생물학적 환경'이 존재해야 날 수 있다. 새를 달나라에 순간이동 시켜보자. 날 수 있나? 아마 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부유'할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요지는, 좌우파를 나누는 어떤 경계,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수많은 헛소리와 궤변, 그리고 정당정치와 대의제를 위한 일종의 '기만'을 위한 좌우의 '양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러운 숨을 내뱉는 바로 그 공간의 '공기'와 '중력', 그러니까 바로 정치적 현실을 위한 '환경'의 필요성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새에게 좌/우의 날개는 조물주에게 맡겨진 하나의 (정당정치적) 숙명이다. 진정한 우파도, 진정한 좌파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에서야, 우리는 그것의 '존재적 필연성'에 대해 재차 반복, 숙달할 필요가 없는 게다. 그것 보다는, 바로 그러한 정치현실적 환경의 개선, - 그 환경이란, 바로 '민주주의'가 가능케 되는 하나의 '물적 토대'를 일컬을 수도 있겠지만 - 그리고 그것을 위한 '중력' 혹은 '산소'가 필요한 시점이라 할 만하다. 

결국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실현 불가능한' 선택의 기로와 관련된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선택'이란 가능한가? 그것은 오히려 '정치적 선택에 대한 선택 불가능성'이라는 우리들의 주체적 아니러니와 관련되지 않는가? 예컨대, 우리들은 현실주의자로서의 우리를 상정하지 않고는 일종의 '탈주' 혹은 '유토피아'의 구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냐는 (체게바라의 '명언'에 대한) 지젝의 사르카즘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안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야.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네. 이때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세. 그러면 불행한 이 몇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 않은가?" p. 265

리영희가 많은 감응을 받았다는 루쉰의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 이 평전에서 가장 의미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어쨋든 이 일화에서 '자네'는 선험적으로 어떤 '지식인'을 상정하고 있다. 이미 깨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필자는 이 일화에 지나친 엘리트주의가 숨어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네'가 해야만 하는 어떤 '선택의 강요'에 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이란 가능한가? 오히려 그것은 리영희에게는 '선택 불가능한' 문제였다.

리영희는 루쉰의 이 일화를 통해 그의 '목표'를, 즉 '소리지르는 사람'으로서의 미래를 지속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고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네'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에는, 리영희와 같은 '저자'의 목소리와, 그를 대변할 '언론'의 존재가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새가 날기 위한 환경적 조건'이리라. 다만, 우리는 리영희의 현실과는 별개로 '반공주의'와 '독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현상황에 대한 '인식'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러한 인식 속에서, '자네'가 소리지르는 행동은 그저 하나의 '소음'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소리지른 자네는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강철'로 된 방 안에 갖혀 있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욕동'을 진정한 '희망'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는 하나의 '메세지'가 선험되어야만 한다. 즉, 우리에게는 '반공주의'와 '독재'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인식과, 진정한 (유토피아적이긴 하지만) '민주주의'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반동적 '제스쳐'가 필요한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선택 불가능한' 문제이다. 요컨대, 우리는 다만 '내부의 확장'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외부'로 이행하는 과정, 그리고 그 정치현실적 '외부'로부터 다시금 '내부'로 향하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으로서 진정한 혁명적 사고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겐 2.0 버전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필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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