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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 모음 2015.겨울 - 30호
자음과모음 편집부 엮음 / 자음과모음 / 2015년 12월
평점 :
0.
계간 자음과모음 전체에 대한 리뷰가 아닌, 단편 중 김사과의 <카레가 있는 책상>에 관한 짤막하고 불친절한 리뷰이다.
1.
“사람을 해하려는 이 강렬한 욕망을 막을 길이 없다.”(106쪽) 이런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누군가의 소설에서 이 문장이 쓰인 이유가 어떤 심리적인 기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기계적인 것에 기인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계적인 것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기계적으로 살아가고야 마는 어떤 기계의 욕망. 다만 방금 인용한 저 문장에서 우리는 바로 그 때문에 ‘욕망’이나 ‘막을 길’이나 혹은 ‘사람을 해하려는’ 같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 여기서 ‘우리’라는 지칭에 대해 모호하다고 느끼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기분 탓일 게다 ― 저 문장에서 단 하나 주목해야 할 표현은 바로 ‘강렬한’ 그 무엇에 관한 것이다. 이 소설은 강렬함을 위해 쓰인 것이고, 또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확실히는 아직 쓰이지 않은, 백지의 소설이다.
2.
고시원이나 고립된 공간을 소재로 한 소설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파편화된 주체. 고립된 생활, 소외되는 청춘들과 시니컬한 청년들. 마르크스가 오래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했던 말을 조금씩 변주하면서, 작가들은 저마다의 공상과 더불어 악무한으로 펼쳐지는 현실 내부의 지옥도를 자꾸만 펼쳐냈다. 김사과 또한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했다. 예컨대 <천국에서>의 경우, 그 무대가 미국이든 뭐든 자꾸만 비춰지는 건 어떤 ‘골방’의 이미지와 그 안에서 펼쳐지는 향락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천국에서>를 출간하면서, 김사과는 (정확하진 않지만) “앞으로 소설을 계속 쓸지는 모르겠다”라는 인터뷰를 했던 것 같다. 이후 그녀는 여행을 다녀왔고, <설탕의 맛>이라는 여행기를 출간했다. 나로서는 한참이나 김사과의 글을 보지 못했던 셈인데, 어쨌든 <카레가 있는 책상>은 오랜만에 접하게 되는 그녀의 소설이다. 소설을 계속 쓰게 될지 모르겠다던 그녀가 다시 소설을 썼고, 나는 그게 (좋든 나쁘든) 일종의 징조라고 생각한다.
3.
“…나 또한 철저히 혼자이므로, 그런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생각해봤는데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인간들이 싫은 것뿐이지,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에 나는 지나치게 게으르고 나약하다. 그것은 물론 전적으로 나를 이딴 식으로 자라도록 방치한 주위 환경 탓이다.”(98쪽)
헬조선의 인간이라는 종種에 관해 탐구할 때, 우리는 이러한 존재의 양태를 ‘전형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도 너도, “게으르고 나약하”지만 동시에 구조의 책임을 묻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제 누구나 박근혜를 비난하고,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삶을 문제 삼지만 사실 그런 건 여전히 구석진 고시원 같은 데서나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그거 정말 실제로 일어나기는 하는 건가?
이런 께름칙한 의문에 더해 지젝은 하나의 농담을 제시한 바 있다. “한 몬테네그로인이 있는데 그는 밤마다 침대 곁에 물이 든 컵과 빈 컵을 함께 갖다놓고 잔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너무 게으른 나머지 자기가 밤에 목이 마를지 아닐지 결정하는 것도 귀찮기 때문”이다. 물론 지젝의 책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이 수수께끼 같은 농담이 등장하는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여기서 우리가 ‘빈 컵’을 하나의 공백으로, 그러니까 존재를 드러내고 솎아내기 위한 공백(부정)으로 상정한다면 주인공인 ‘나’가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 ― 적어도 ‘머릿속’으로 그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혐오한다 ― 를 부정함으로써만 동시에 ‘혼자이기는 싫은’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는 굉장히 전형적인 주체상이기는 하다. 우리는 대게 혐오와 본능 사이에서, 혹은 관음증과 홀로 있음 속에서 매일 매일을 지속하고 있으므로. 다만 주인공 ‘나’가 언급하듯 “아무도 아무에게 관심이 없는”(103쪽) 상황에서, 부정을 통한 존재의 긍정은 그 운동성을 상실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부정을 통한 긍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그 동학을 획득하는 무한한 진자 운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함께 드러나야 할 것은, 헬조선의 우리가 전형적 주체성이나 기계적 ‘운동’을 모르고 살아갈 리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언젠가 지젝의 언급처럼 ‘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할’뿐더러, 정확히 그 중핵에 서서 이 진자 운동에 자꾸만 휩쓸리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게으름과 무력함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점차 부정해 나가면서, 기실 그 욕망의 ‘강렬함’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소거하는 일도 이에 포함될 테고.
4.
카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연히 포착되는 감각(미각 혹은 후각)이다. 카레는 나중에 ‘버블티 여자’와의 바로 그 강렬한(?) 조우를 통해 ‘햄버거’로 너무나 쉽게 치환되는데, 이는 결국 작품의 말미에서 ‘나’의 꿈을 통해 인간의 육체(버블티 여자의 팔)로 귀결된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서 먹어야 하고, 그것이 카레든 햄버거든 누군가의 팔이든 결국 타인에게 혐오감을 줄 뿐이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이것은 네크로필리아(시체 성애)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부드럽고 싱싱한”(105쪽) 신체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또 한 번 강렬한 것이 된다. 인간을 부정하고 해하려 하지만, 나의 존재를 소화기관의 “부드럽고 안전한” 기계적 운동 속에 위치 짓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먹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우리는 카레가 '없는' 책상을 동시에 욕망하는 주체들이기도 하다.
5.
덧. 나는 황인찬의 시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한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리고 주인공 ‘나’의 독백을 함께 읽어본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거리에, 내 옆에, 벽 안에, 벽 너머에, 아무도 만나지를 않는다. 누구도 누구를 쳐다보고 있지 않다. (…) 곧 졸려질 것이다. 오래오래 깨지 않고 잠들기를 바란다. (…) 안의 사람들은 잠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103~104쪽)
그리고 이것이, 그러니까 이 소설 전체가 독백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텅 빈 독백은 꽉 막힌 대화보다 훨씬 더 강렬한 법이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우리는 당최 ‘잠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