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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다른 면에서 조금 '특별하게는', 필자에게 꽤 유용한 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비록 이런저런 개인사로 인해 허겁지겁 읽어내려 가느라 오독하거나 놓친 부분들도 상당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저자들의 생각은 단순히 '자본주의'와 '발전'에 대해 필자가 생각했던 일부의 생각들이, 그저 단순한 '현상인식'에서 비롯된, 모자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곤 했으니 말이다.  

어쨋든 '발전=변화(혹은 진보)'라는 공식에 있어, 우리는 이 동치된 관계 속에서 '='라는 기호에 대해 다시한 번, 우리들의 생각을 '빗금치는' 작업이 필요한 때는 아닌가?  

"발전은 현실을 담아내는 인식이고, 사회를 달래는 신화이고, 욕망을 풀어놓는 환상이"(p.24)라는 작스의 말처럼, 그것은 결국 우리들 사회를 바라보는 모든 '기능주의적' 관점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부풀어오른 자의식처럼 '눈에 띄는' 현상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깃털처럼, 천천히 '부유하고', 또 '가라앉는다.'  또한 그것은 발전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삐딱하게' 재구성하는 것과 관련된다. 왜냐고? 이미 그 대상(발전이라는 관념)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외상적 (관념을 바라보는)왜상'과 관련된다. 지난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발전이라는 하나의 '증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은 이미 '외상적'이며, 따라서 그것이 어떤 '실재적 형상'을 띄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색안경'을 거두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발전'이라는 제목의 3D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에서 '3D용 안경'을 제거하라는 의미다. 그럼 스크린에선, 하나의 '왜상'이 펼쳐지지 않는가? 실재를 마주하는 것, 지젝(라캉)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사막을 마주하는 일'이나 다름없는지도.

"생태 관료주의가 떠오르면 사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가 같은, 사회 윤리를 둘러싼 근본적 논의가 묻힌다. 그리고 서구인의 욕망이 서구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암묵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며 생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고 낮은 수준의 상품 거래를 일부러 선호하는 사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p.93 

이러한 문구들은, 마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경험하게되는 순간과 겹쳐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쨋든 이러한 말은 자본주의 내부의 '맑스적 유령'을 확실히 현시하는 듯한데, '생태 관료주의'라는 저 오만한 개념에 대항한 '근본적 논의'란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빈곤층의 가난은 부유층의 풍요를 만들고, 빈곤층의 굴욕은 자부심을 낳고, 빈곤층의 의존성은 부유층의 자립성을 낳는다. 따라잡기를 통한 평등은 현실의 불평등을 조직하고 합리화하는 신화에 불과하다." p.121 

'선험적' 불평등(세계경제구조는 불평등을 만들어내며, 그러한 불평등을 동력으로 구조화된다는 것)이란, 결국 이러한 세계적 '이율배반'과 관련된다. 물론 그것은 경제적 모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 하나의 '신화'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과도 겹쳐지듯, 이것은 '세계사회'를 움직이는 하나의 집단-무의식적 연료이다. 트루먼이 남/북반구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누는 연설을 내뱉고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 순간, 소위 '저개발 국가'들은 '미국'이라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산 증인은 바로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과 박정희는 아닌가? 또한 결국 트루먼이 말한 '낡은 제국주의'를 대신할 대체물이란, 하나의 새로운 '문화-경제적 파시즘'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계획이라는 개념은 마음먹은 대로 사회 변화를 설계하고 주도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구현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는 계획수립을 통해 진보의 길을 따라 그런대로 순탄하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언제나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로 여겨졌다. 그것은 굳이 발전 전문가가 나서서 애써 설득할 필요조차 없는 공리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p.283

여기서 저자는 푸코의 '생태 정치'를 언급하며 권력이 모든 복지를 장악하고 자료화하는 동시에 사회 자체를 '제어하는' 모습을 통해 현실적 사례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개발도상국이 하나의 '계획'을 통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하나의 공리로 인식되며, 따라서 어떤 '비판의 대상'도 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공리적 인식, 즉 선험된 '계획'이야말로 국가권력이 잘 유지,보수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좀비PC와 같은 것은 아닌지.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 설계를 거부한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에 새로운 대서사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드러내지만, 사회적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해서 말한 것은 마르크스의 유산에 근본적 약점을 남겼다." p.506 

저자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계속 사용하거나, '사회주의식 발전'에 대한 '변종적 추구'를 할 경우, 일종의 마르크스에 대한 '오독'을 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역사적 오해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국 이것은 현대의 탈근대적 이론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비판'이라 할 만한데(혹은 기표의 용법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결국 소련식 사회주의의 한계나 자본주의적 기만에 대항하는 것은 이러한 '오해'의 가능성을 절멸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명확성과 더불어, 일종의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결론과도 관련된다. 

제법 허덕거리면서 읽긴 했지만, 어쨋든 19개의 다양한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들의 목소리는 공통성을 갖고 있는듯 보인다. 그것은 앞서도 설명했듯 '발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주체의 외상적 왜상을 '발견'해내는 일이며, 동시에 발전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즉자적인 발전, 즉 '발전적'인 발전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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