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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자괴감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두들겨 맞고 난 다음에는, 왠지모를 기시감이 든다.

0.  

이 리뷰는 두서가 없을 예정이다. 

1. 

로쟈(의 '책을 읽을 자유') 리뷰에서도 잠깐 밝힌바가 있지만, 쨌든 메타비평만큼이나 '감히' 손가락을 놀리기 힘든 글쓰기도 없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쉽게' 다가섰던 로쟈의 '저공' 비행과는 좀 다르게, 최정우의 비행은 확연히 '고공'을 날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엘리트주의라던가 나르시시즘이라던가 하고는 거리가 약간 있는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쓰기가 하나의 '귀감'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필자로 하여금 이 새벽의 타자놀이를 '타자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글쓰기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또한 로쟈 리뷰에서도 밝힌 바가 있듯이(이쯤 되면 로쟈 리뷰가 뭐 대단한 거나 되는줄 알지도 모르지만, 사실 별거 없다. 흐흐.) 리뷰 혹은 비평이란 게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만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면, 이건 확실히 리뷰도 비평도 아닌, (항상 아름답고 규칙적이며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흘러가는 사회에 대한)하나의 불협화음이자, 분절되고 재조립되어 버린 필자 자신의 현실에 대한, 그리고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두드려대는 키보드라는 타악기를 위한, 하나의 진혼곡이다. 아, '알흠다운' 취업준비생(=대학 4년)의 '현실'이여. 

2.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루기에는 필자의 한계가 명확하다. 그래서 잠깐 잡설 하나를 해보고자 한다. 들뢰즈 이야기인데, <시네마>라는 두통유발 S급 도서를 읽고 있다가 만난 <사유의 악보>의 글쓰기, 사유 등등은 약간 '연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최정우의 '서곡'을 보자.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 p.8 

그리고 <시네마2 시간-이미지>의 7장, '사유와 영화'에서 나오는 들뢰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우리는 아직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자신에 대한 사유의 불가능성만큼 전체에 대한 사유의 불가능성, 끈임없이 화석화되고 무너져 내리는 사유, 그것에 대해서만 사유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이렇게 병치해놓고 보면 그가 말하는 사유의 '조각들'이란, 이렇게 마치 우리가 사유하고 있다는 행위-사실에 대한 '불가능성'의 발견이자, 결국 사유가 만들어내는 조각성에 대한 '사유'인 것처럼 들린다. 내친 김에 하이데거의 얘기까지 들어보자. 

"사유하게-하는 것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의 상태가 끊임없이 사유하게-하는 상태로 변해가더라도 아직까지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략) 사유하게-하는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하는 것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 <무엇이 사유함을 요청하는가> 

그렇다. 사실 우리는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을 사유할 수(사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최정우가 들려주는 '사유'에 대한 '조각난 사유', 기형과 잡종의 '신체(육체)'들이야말로 들뢰즈의 '그것'과 연결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우리에겐 "사유해야만 한다!"는 당위, 혹은 강박적 선언의 필요성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는 '사유-행위' 자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사유는 '누구'로부터 '흘러' 들어와서는, '어디로' 조용히(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게 되는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이것은 사유의 '조각화'를 통하여 진정한 사유-행위 자체의 즉자/대자적인 '조각組閣화(조직화)'를 이루려는 시도로 판단된다.  

3. 

책 리뷰에 대해 최정우님(람혼)이 답변을 달아주시는 저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부진아같은 리뷰보다, 몇 가지 책 내용에 대한 질문들을 남겨놓고자 한다.  

- 이른바 '라캉으로의 복귀'(그러니까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이라는)는, 마치 라캉에 대해 지젝이 가지고 있는(그리고 우리들 독자가 '호명'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환기'시켜주는 작업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건 말하신대로 '순수한 라캉주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일 텐데, 과연 이러한 '청년 라캉'으로의 복귀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라캉없는) 라캉주의'들이 어떻게 변화해나갈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네요. (관련내용 485-491쪽) 

- 개인적으로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를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 같습니다. 읽다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뮈(까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확히 말하면 <시지프 신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 편을 읽으면서, 로쟈의 번역비평도 생각나고, 제가 힘겹게 읽어내려갔던 랑시에르의 몇몇 책들이 떠올랐는데요, 직접 번역을 좀 (자주, 많이)해주시는게 어떨지요? 흐흐.  

4. 

각주에 대한 각주.  

"... 나는 밤 앞에 서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그대로 새벽을 맞이한다, 내가 어디에 있다가 왔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어딘가로 튕겨졌다가, 다시 다른 어딘가로 튕겨져 왔다는 기억만이,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버젓이 살아 있을 뿐이었다,,,(중략) 그 이후로 나는 잠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벌건 대낮을 송두리째 흙 뿌리 같은 어둠으로 죄다 포장해버렸던 듯도 하다,그래, 여기는 캄캄하다, 여기는, 말도, 안되게, 캄캄하다,,,(중략) " p.517-518 1)

1) 밤이 듣는다 - 에레나
 밤의 곁에 나는 이끼처럼 머문다
(내 몸 타고 미끄러져 가는 옛 노래)
내 하늘을 가득 소음으로 채운다
(새들만이 주소를 알아본 섬나라)
이런 밤은 다른 세계란 걸 믿는다
(빌딩보다 구름이 낮은 밤)

흔적 없이 길은 노래 뒤로 숨었다
(베개 속에 꺼져 있던 길의 숨소리)
잠을 깨워 술을 불러 함께 걷는다
(느릿하게 물러나는 밤의 눈동자)
너무 커서 못 보는 얼굴이 그립다
(빈 액자가 발끝에 치인 밤)

골목마다 다른 불빛들이 환하다
(누구 하나 듣고 있지 않은 노래들
비도 없이 멜로디는 젖어 무겁다
(섬나라의 시민들이 적은 손 글씨)
이런 밤은 색이 바랠 만큼 걷는다
(익숙해진 노래를 망치는 비-밀)
사람들은 어딜 떠나려고 바쁘다
(밤 열차는 여기에 소리로 남는다)

밤이 듣는다(누가 떨면서 있다)
다정함을 지키던 마음 속
괄호가 새들 틈으로 날아갈 때 온 밤이 듣는다
밤이 듣는다(꼭 붙어서 있다)
바위 속에 한 번쯤 닿고픈
이끼가 새벽쪽으로 커갈 때 온 밤이 듣는다

밤의 곁에 나는 이끼처럼 머문다
(내 몸 타고 미끄러져 가는 소리들)
이런 밤은 다른 세계란 걸 믿는다
(내 하늘은 가득 소음 속에 갇힌다)


music by ELENA
word by BANG YOUNG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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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2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jk7228님의 소중한 리뷰 너무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나 2절에서 제가 사용하고 의미한 '사유'의 개념을 들뢰즈와 하이데거의 언급과 비교하시는 지점에선 무릎을 치며 탄복했습니다. 제 '사유' 개념의 전사(前史)와 맥락을 이렇게 적확하게 짚어 주신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 바로 그 사유의 사유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하고 싶은 마음이고, 이 책 또한 바로 그러한 욕망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유 불가능성을 함께 사유할 가능성, 곧 그 (불)가능성을 공유해주심에 더욱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던져주신 질문들에 대한 답변:

1) 저는 제가 말했던 '지젝을 경유하지 않은 라캉'에 대한 강조가 특정 라캉주의자들(지젝-라캉-헤겔주의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말씀하신 대로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 또는 우리의 어떤 특정한 이해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러한 '환기' 자체가 그 이데올로기 자체의 소멸로 바로 이어지지도 않고 또 제가 그것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현재 라캉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지반이 어떤 지평 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가 예민하게 인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비유하자면, 그 이해 지평이라는 '상징계'가 '후기성' 혹은 '파국'이라고 하는 어떤 이론적 '실재' 위에 있음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그 극단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일단은 이러한 지평(에 대한 지평)에 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2)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에 대해서는 독자들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현상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카뮈와 그의 책이 대단히 '반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가 서곡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그의 반동적인 실존철학의 문제 틀('자살')을 더 확장된 형태의 다른 틀('절멸)로 - 하지만 그와 같은 강도(强度)의 어떤 절실함을 갖고 - 대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의 지점은 어쩌면 저 '반복(repetition)'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유하고 재전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저도 번역을 많이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제약들의 내용을 자세히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만큼 번역이라는 형태와 지점에 대해서 (과도할 정도로) 예민한 성격이라, 제 자신이 번역에 임할 때 스스로에게 (역시나 과도할 만큼의) 엄격성을 부과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이 때때로 제 자신을 매우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각주에 대한 각주 형식도 매우 소중하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의 '종곡'은, 아마도 섬세하게 느끼셨을 테지만, 본문이라는 공간의 부재를 통해 그 본문이 '본래'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곧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존재라고 하는 것이 어떤 부재 위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형식이었는데, 그 점을 또 다른 변주로 연주해주신 것 같아 너무 반갑고 감사했답니다.^^ 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기보다, 아마도 계속될 것입니다.